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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허정 Oct 08. 2019

카페에서 만난 나의 과거

내가 걸어온 시간을 걷고 있는 당신에게

개천절, 경주에 바람을 쐬러 갔다. 내가 사는 울산에서는 차로 1시간 남짓 거리. 어릴 적부터 가까운 경주로 나들이를 자주 가곤 했는데, 어른이 된 지금도 바람을 쐬러 가기 만만한 곳이 경주다. 내가 어릴 때 경주가 가지고 있었던 한적한 모습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추억이 많이 깃들어 있어서인지 제2의 고향처럼 마음이 편한 곳이다.


요즘 SNS에서 인기라는 한 카페에 찾아갔다. 유명세만큼이나 카페의 외관과 내부 인테리어는 화려했다. 마치 유명 화가의 갤러리에 와 있는 듯한 황홀한 기분이 들었다. 역시나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삼삼오오 둘러앉아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는 사람, 정장 차림을 하고 노트북으로 일을 하고 있는 사람. 각자 나름대로의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중에 알콩달콩 연애를 막 시작한 듯 보이는 커플이 눈에 띈다. 데이트가 끝나고 각자 집으로 가야 하는 게 아쉬운 지 대화를 나누는 두 남녀의 눈빛이 애절하기만 하다.


"오빠, 우리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랬었는데. 얼마나 아쉬울까. 우리 연애할 때 생각난다."

우리의 풋풋했던 연애 시절을 떠올리며 카운터로 발걸음을 향한다.




커피를 주문하며

당신의 꿈을 응원합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아이스 바닐라 라떼 한 잔 주세요." 내가 주문을 하자 점원이 친절하게 주문을 받는다. 20대 중반 정도의 사회 초년생으로 보이는 점원의 미소에는 열정이 가득 차 있다. 나는 그녀의 모습에서 내가 20대 초반이었던 대학생 시절,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했던 토익 강사로서의 모습을 떠올렸다.


나는 식품공학을 전공한 이과생이다. 졸업 후에는 당연히 연구원이 될 줄 알았다. 그래서 실험실이 아닌 바깥세상에서의 경험을 쌓아보려 찾아간 곳은 토익학원이었다. 어쩌면 영어를 좋아하고 가르치는 일을 좋아해서 아르바이트로 토익 강사를 택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곳이 내 첫 직장이 될 줄이야.


원장님께서 문법 유형들에 대해 설명을 하시면, 나는 수업 후 문제 풀이를 하는 보조 강사로 일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대학 졸업 전에 토익 성적이 필요했기 때문에 내 공부도 하면서 용돈도 벌 수 있겠다는 나름의 기특한 생각도 했다. 그런데 가르치다 보니 욕심이 생겼다. 좀 더 쉽게, 잘 전달하고 싶어 졌다. 고작 하루에 50분짜리 수업 하나였지만 나는 그 시간을 위해 3시간, 4시간의 준비를 하고 갔다. 질문을 해 주시는 학생 한 분 한 분께 내가 아는 모든 것을 동원해 설명을 해 드렸다.


그렇게 2달의 시간이 흘렀고, 나는 개강을 위해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다시 돌아온 여름 방학, 원장님께서 연락이 오셨다. 전에 배웠던 학생들이 나에 대해 너무 좋은 평가를 해주어서 다시 함께 일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내 열정이 그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던 걸까. 그렇게 나는 다시 저녁에 짬을 내어 일을 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지금 내 커리어의 시작이 되었다.


토익 강사는 내 꿈이 아니었지만 열정을 다했던 그 시간들이, 결국 지금의 나를 만들어주는 밑거름이 되었다. 카페에서 만난 그 점원도, 커피를 배우고 싶은 사람일 수도 있고 혹은 다른 꿈을 향해서 지금 다양한 경험을 하고 있는 중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열정 가득한 모습으로 대하는 모든 시간들이, 나에게 그랬듯 그녀에게도 훌륭한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다. 열정 가득히 꿈을 향해 나아가는 그녀에게, 그리고 과거의 나에게도 응원의 메시지를 보낸다. 너무나도 빛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자리를 찾으며

지금, 바로 여기


커피를 마실 자리를 찾으며 카페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뷰가 좋은 자리는 이미 만석이다. 예전 같았으면 곧 일어날 사람은 없을지 더 찾아다녔겠지만, 지금의 나는 금방 포기하고 편해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자리에 앉아 한숨 돌리니 모여 앉아 깔깔대며 셀카를 함께 찍어대는 3명의 아가씨들이 보인다. 20대 중반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엄마 미소를 짓는다. 


나도 한때는 어딜 가나 열심히 사진을 찍던 때가 있었다. 그 당시 나는 SNS,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스타그램에 중독되어 있었다. 20대 중반, 막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돈도 생기고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생겼다. 그러면서 인스타에서 소위 핫하다는 카페나 여행지를 찾아 국내, 해외를 막론하고 친구들과 신나게 다니곤 했다. 좋은 카페에 가서 수도 없이 많은 셀카를 찍고, 유명한 여행지에 가서 사진이 잘 나올 때까지 서로를 찍어주었다. 그러고 나서 잘 나온 사진을 골라 인스타에 올리고, 그 게시물에 눌려진 좋아요와 댓글의 수를 확인하며 뿌듯해했다. 그렇게 내 미션은 달성된 듯했다. 그런데 그렇게 즐거웠던 여행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은 뭔가 모르게 허무한 느낌이 들곤 했다.


지나고 보니 그 순간의 추억들은 남겨진 사진 몇 장만을 남기고 송두리째 날아가버린 듯했다. 나는 이렇게 좋은 곳에 다니면서 맛있는 걸 먹고 있어라는 걸 마치 자랑이라도 하듯 인증샷을 남기기에만 바빴다. 카메라 렌즈에 담겨질 내 모습에 열중하느라, 정작 카메라에 담긴 그 아름다운 풍경을 나는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마치 인증샷 남기기 대회라도 하듯, 너도 나도 남들에게 보여 줄 사진을 찍는 데에만 열중해 있었다. 정작 그 자리에 그 시간에 있었던 우리는 잊은 채로.


지금 이 시간을 보내는 내가 아니라, 카메라 렌즈 너머의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내가 먼저였다. 가만히 앉아 그 순간을 진정으로 즐기지 못했다. 수백 장의 사진 중에 건진 몇 장의 사진을 보고 그 시간을 추억할 게 아니라, 그 시간에 집중했어야 했다. 내가 지금 있는 곳, 내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집중하는 것이 맞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 시간들을 한창 달리다가 멈추고 나서야, 그제서야 뒤늦게 느낄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나와 있는 이 시간에 온전히 마음을 다 해 주는 친구와 함께하길 바란다. 사진이 아니라 서로의 가슴으로 지금 이 시간을 추억해주기를 바란다. 나에게도, 친구에게도 다신 돌아오지 않을 소중한 시간이니까.




카페를 나서며

지금의 나도
누군가가 걸었을 과거


옆 테이블에 앉아 계신 네다섯 명의 엄마 무리가 우리를 쳐다보신다. 우리 엄마와 나이 때가 비슷해 보이시는 걸로 봐서, 나와 비슷한 나이의 딸이나 며느리가 있으시겠지. 그들이 본 내 모습은 한창 반짝반짝 빛나는 청춘일까, 아니면 아픈 시간을 버티며 흔들리고 있는 가엾은 청춘일까. 흔들리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청춘이길 바라며 카페 문을 나선다.


카페에서 내가 걸어온 과거를 걷고 있는 사람들을 보았듯, 나도 이 카페에 앉아 있던 누군가의 과거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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