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이름이박힌책한권

이젠 갈 곳이

by 허정구

갈 곳이 여기뿐이네.

늘 그랬다. 내가 갈 곳은 일터가 있는 그곳뿐이었다. 혼자 사는 건 별반 어려움도 부족함도 없는데 늘 명절에 느끼는 감정은 (조금은) 내 현실을 실감하게 되는 것.


애들이 먼 길을 내려와 주었지만 편히 쉴 수 있는 곳이 없고 뭘 하며 즐거운 시간을 같이 보낼 여유도 없었다.


늙은 나의 엄마는 허리도 제대로 못 펴면서 할 수 있는 맛난 것들을 차려내고 치우는 모습이 안쓰러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애들과 밥 한 끼 먹는 것도 이젠 내겐 호사가 되어버렸다.


'팔이 아파서 목욕도 제 맘껏 못한다'는 엄마의 말을 듣지만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없었다. 평생 누군가에게 밥을 차려주고 있지만 그 누구도 대신 밥 차려 않는다


번듯한 집이 없는 서글픔.

저렇게 높은 아파트가 온 사방에 숲처럼 솟구쳐 있지만 내 집은 없다는 걸 실감한다.


혼자 사는 건 어렵지 않은데 같이 사는 건 쉽지 않다. 이제 일터마저 버리면 나는 어디에 머물 수 있을까.


일에서 느끼는 힘겨움에 마음마저 이제 숨으려 하지만 숨을 곳조차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되면 삶에서 지워진 여러 가지 역할에서


나는 아들로서의 역할도, 아빠로서의 역할도, 형으로서의 역할도 가족으로서의 역할도 친구로서의 역할도 모두 낙제점이다. 그렇게 내게 주어진 모든 역할에서 낙제점을 받곤 근근이 나 하나 나로서의 역할에 기껏 60점을 넘긴듯하다.


뭘 할 수 있을까. 도망만 꿈꾸는 삶에서 이제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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