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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이름이박힌책한권

큰 바람 큰 비

by 허정구

태풍이 온다고 여기저기 모두 분주하다.
큰 비와 함께 큰 바람이 휘몰아쳐 봄에 뿌린 씨앗이 그 여름날 뜨거운 땡볕에서 자라 열매를 맺고 이제 막 시작된 가을에 익어가려는 지금에 와서 헤치려 하니 그래서 더 분주한가 보다.

나도 오늘 분주한 하루를 보냈다. 제주에 와서 처음 맞는 태풍이라 이곳저곳 400세대나 되는 이 넓은 공간에 어디에 어떤 흔적을 남기고 갈지 모르기에 꽁꽁 묶어두고, 바람 한점 통할 틈 없게 닫아두느라 바쁜 하루였다.

지금도 비바람이 휙휙 또는 훅훅 소리를 내며 '나 여기 왔네! 나 지나가네!' 하며 위세를 떨치고 있다.

근데 생각해보니 이런 큰 비와 큰 바람이 한 번씩 와야 둘러보고 확인하고 또 가다듬고 하는 일상의 하루를 보내며, 내 인생에도 이런 태풍이 한 번씩 왔었구나. 와야겠구나 하는 생각 해본다.

맘 속에 잔뜩 쌓아놓은 찌꺼기들이 막아놓은 배수구도 뚫어야 하고
여기저기 상처 나고 헤져 낡아 구멍 난 마음도 깨끗이 덧대야 하고
외로움에 그리움에 휘청휘청 흔들리는 마음도 단단히 꽁꽁 붙잡아 맬 수 있도록
정리하고 준비하고 단장해서 큰 비와 바람 이겨내고 새로운 내일을 맞이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니

오늘 이 밤 제주도를 지나가는 링링과 같이 내게도 한 번쯤 마음을 지나가는 링링이 있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아무쪼록 내 맘을 지나는 링링은 내게 큰 흔적을 남겨도 괜찮으니...... 제주도 지나가는, 한반도 지나갈 링링은 지금만큼만 흔적 남기고 그냥 갔으면... 바람에 날린 낙엽은 내일 내가 치울게... 너 온 거 알고 너 지나가는 거 충분히 알겠으니 조신히 사뿐히 지나가렴.

•13호 태풍 '링링'은 홍콩에서 제출한 이름으로, 애정을 담아 "소녀"를 부르는 뜻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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