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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그대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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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헌일 Jul 18. 2019

술잔


방금 입 안에 털어 넣은

소주의 화학 약품 냄새가 채 가시기도 전에

남자는 또다시 연거푸 술잔을 들이켠다.

넉 잔의 술을 빠르게 비우고 나니

화한 기운이 속을 어지럽히는데

그 때문인지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술잔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간다.


술기운에 따뜻해진 손으로  쥐고 있던 탓인지

술잔은 미지근하다 못해 스한 기운을 품고 있다.


따뜻한 술잔에 술을 따라

바로 목구멍으로 넘기니

앞서 마셨던 넉 잔의 술보다

더욱 화하고 겁다.

남자는 눈을 질끈 감고 인상을 찌푸린다.

이윽고 남자의 몸을 덮친 뜨거운 열이

머리 끝까지 치솟아 올라

어지럽고 몽롱한 기분 들게 하는데

남자는 그 느낌이 썩 나쁘지 않은 모양이다.

그대로 지그시 눈을 감고서

뜨거워진 볼을 매만지며

조용히 자신의 온도를 느끼는 와중에

문득, 헤어진 그녀가 머릿속을 스친다.




그녀의 몸은

계절을 가리지 않고

항상 차가웠다.

손과 발은 물론이고

얼굴도 언제나 얼음장 같았는데

그래서 유독 남들보다

추위를 더 잘 탔던 것 같다.

그런 그녀의 차가운 볼 내 손으로 매만지면

그녀는 나의 따한 기운이 느껴진다며

그렇게 좋아라 했던 기억이 문득 떠오른다.

그때 그녀가 느꼈던 그 따스함이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이 온도와 비슷했을까.





늦은 밤, 야근을 마 그녀

서둘러 집에 도착하자마자

급히 입고 있던 옷들을 벗어던진다.

벗은 옷가지들이 거실을 어지럽히지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욕실로 들어선다.

퇴근길에 쐿던 선선한 밤바람 때문인지

그녀는  몸을 데우기 위해

얼른 욕조에 따뜻한 물 받아 뛰어든다.

가볍게 목욕을 마치고 나온 그녀는

지친 몸을 이끌고 곧바로 주방으로 향

간단 안주거리를 만들어 식탁 위에 놔둔 뒤,

냉장고에서 소주 한 병을 꺼내 쥐고

바로 뒤돌아있는 찬장에서 술잔을 꺼내

다시 식탁으로 돌아와 앉다.

따라락-

병뚜껑을 따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첫 잔을 따르려던 찰나,

그녀는 뭔가 떠오른 듯

지그시 술잔을 만져본다.


누군가 따뜻한 손으로 꼭 쥐고 있던 것처럼

술잔은 미지근하다 못해 스한 기운을 품고 있다.


그녀는 따르려던 술병을 내려놓더니

인상을 찌푸리고 원망스러운 듯

식탁에 올려진 술잔을 쳐다본다.

잔을 깨뜨릴 듯이 노려보던 그녀는

이내 술잔을 쥐고 주방으로 향해

냉장고의 냉동실 한편 넣어두고서

술잔이 차갑게 식기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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