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것을 남겨두고
가진 것 없이 떠나
봐주는 이 하나 없이
세월의 기류로 흘러들어
불투명한 존재로 남겨졌다.
그렇게 정적에 물듦으로
존재의 인기척을
땅 속 저 깊은 곳에 묻었다.
긴 시간 흐른 뒤,
그 자취를 다시 꺼내어 보았을 때
무언가 의미를 지녔었던 것처럼
그때를 기억하기 위함이었고
애써 나 자신을 어설프게나마 달래고 싶었던
애처롭기 그지없는 개인적인 행위였다.
두터운 입김이 나를 감싸게 하여
처량한 내 모습을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오늘의 나는 주책스럽게도
내가 나에게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하고
어렴풋이 생각해본다.
여러 해가 지난 무렵의
모다 깃비가 내리고 있는 어느 봄날이다.
나는 지금 이 자리에
다시 두 발을 딛고 서있다.
묵묵히 세차게 내리는 비를 맞으며
굳건해진 손짓으로
질어진 땅을 파헤쳐나갔다.
저 밑으로 가라앉혔던 자기애를 꺼내
차분히 손으로 감싸 올렸다.
곧게 뻗은 열 손가락으로
모자람 없이 쥘 수 있을 정도의
무척 왜소한 모습으로 잠들어있다.
활화산처럼 끓어오르는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내 손 안의 이 작은 존재도
똑같이 느끼는 것인지
조금씩 움찔거렸다.
감정이 휘몰아치는 소용돌이 속에서
잠시 태풍의 눈을 맞이한 것처럼
어렵게 되돌아온 나의 목소리로
나 자신을 불러본다.
무겁게 떨어지는 빗물,
가느다랗지만 거대한 떨림
그리고
나를 부르는 나 자신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정적으로 떠돌던 나는
희미해져 가는 의식의 맨 끝에서
떨리고 있는 거대한 손바닥 위,
자신을 감싸 쥔 한 거인의
일렁이는 눈과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