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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홍 Oct 02. 2021

산티아고 순례길, 팜플로나 ~ 로르카, 41.9km

07. Day4, 인생의 현자,  깨달음은 무의식 속에 생겨난다.

 "산티아고는 길을 잃으면 다시 돌아가서 찾으면 되지만, 인생을 살다 보면 때론 다시 돌아갈 수 없을 수도 있단다. 사람을 잘못 만나서, 점점 똑바로 가는 사람들과 거리와 방향이 벌어진다. 그렇기에 이 길을 혼자 걸으면서 훈련을 해야 한단다."



 새벽 4시 눈이 떠졌다. 오늘 목표는 에스테라까지이다. 다른 사람들이 이틀에 걸쳐 가는 것을 하루 만에 가보는 것. 대부분 아직 잠들고 있는 5시에 나 홀로 나왔다. 팜플로나는 대도시라 도시를 빠져나오는데만 한 시간이 걸렸다. 도시 외곽에서는 노란 화살표가 사라져 잠시 길을 잃기도 했다.


왼쪽. 새벽의 팜플로나,  오른쪽. 팜플로나를 열심히 벗어나는 중!


 그렇게 한참을 걷다 논밭이 펼쳐졌다. 오늘 가는 길에서 가장 힘들다는 산에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막상 가보니 처음 갔던 피레네 산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역시 내성이 생긴 건지 내 어깨와 두 다리도 조금씩 견딜만한 게 느껴졌다. 산에 오르는 길은 안개로 가득했다. 앞에 한 50m 정도만 보이고 아무것도 안보였다. 



 산 꼭대기에 올랐을 때, 드디어 '용서의 언덕'에 도착했다. 이곳은 순례길의 명소로 프랑스 순례길을 걸을 때 포스터로도 활용되는 동상들이 있다. 순례길에서는 많은 인위적인 조형물들이 있는데, 이런 사소한 조형물에 대해서도 생각을 하고,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순례길의 명소. 안개가 가득 낀 '용서의 언덕'

 용서의 언덕에서 한 20분 동안 멍하니 생각을 했다. 내가 살면서 잘못한 것은 무엇일까.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용서를 구할 주체도 나고, 용서도 받을 주체도 나라는 것을. 결국 이 언덕은 나 스스로에게 용서하라는 것이 아닐까? 살면서 자기 자신에게 가장 많은 채찍질을 하게 되는 것은 나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원하는 결과가 안 나왔을 때, 생각한 만큼 잘 되지 않았을 때, "수고했어"라는 말 한마디보단 "왜 그랬을까."라는 후회가 밀려오고는 했다. 결국 나를 다그치는 것은 언제나 나 자신이었다. 그렇기에 이 언덕에서는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에 대해 나 스스로 용서를 구하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충분히 칭찬받을 자격이 있으니, 스스로 잔인해지지 말라고,"


 그렇게 잠시 생각을 하고 내려오는데, 저 멀리서 안개가 걷히는 것이 보였다. "아.... 좀만 더 남아있을 걸..."

내려오면서 한 한국인 할아버지를 만났다. 한 65세쯤 되는 할아버지께 아쉽다고 말씀드렸더니, "그건 이번에 맑은 하늘을 너한테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야. 나중에 다시 오라는 하늘의 뜻이란다"라는 것이다. 이 할아버지는 인생을 살면서 많은 것을 느끼신 분 같았다.


왼쪽. 용서의 언덕을 내려오는 순례자들,  오른쪽. 잠시 쉬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순례자들


 그렇게 한 2시간 정도 할아버지랑 같이 걸었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 심상치가 않다. 나이에 비해서 정말 너무 잘 걸으신다. 어쩔 때는 뛸 때도 있었다. 도저히 27살의 내가 따라갈 수 있는 속도가 아니었다.


나 : 할아버지 대체 정체가 뭐예요? 어떻게 그렇게 잘 걸어요??

할아버지 : 아! 나 10년 동안 산만 다녔어 ㅎㅎ. 20여 년 전에 어떤 병에 걸려서 삶을 다 정리하고 10년 동안 산만 다녔단다.

나 : 아 진짜요??

할아버지 : 그리고 나이 60이 다 돼서 철인 3종 경기에 나가 우승도 한 번 해봤단다.

나 : 헉..... 어쩐지........


 할아버지는 한 번 우승하고 나서 사람들의 박수소리와 함성보다는 무의식적으로 고요함에 묻혀 있던 것이 너무 좋았다 하셨다. 그래서 이번 산티아고에서도 그런 고요함을 느껴보고 싶다고 하셨다. 


 나 : 저도 평소에 생각이 너무 많아 이번 기회에 좀 정리하고 싶어요. 그런데 막상 걸으면서 생각을 하려고 하면 잘 생각이 나진 않아요. 책에서 본 것이랑은 좀 다른 거 같아요.

할아버지 : 생각을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억지로 생각하는 것은 초보들이나 하는 거란다. 그런 고민에 대한 깨달음은 무의식적으로 생겨나는 거란다. 그러니깐 혼자 생각하고 싶으면 한국인들이랑 걷지 말고 혼자 걷도록 해라. 그럼 어느 순간 생겨날 거야. 산티아고는 길을 잃으면 돌아가면 되지만, 인생을 살다 보면 때때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을 때가 있어. 사람을 잘못 만나서, 잘못된 길에 빠져서 점점 똑바로 가는 사람들과 거리와 방향이 벌어지게 된다. 또 나이가 먹을수록 잘못 가면 돌이킬 수 없기에 이번 기회에 그런 훈련도 한 번 해보렴!

나 : 할아버지! 너무 좋은 말씀이신 거 같아요! 잘 새겨듣겠습니다.

할아버지 : 그래. 난 이제 뒤에 일행을 잠시 기다릴 테니 먼저 가거라~! 부엔 까미노~!


 할아버지는 나보고 혼자 생각하라고 일부러 보내주신 느낌이었다. 오늘 나는 인생의 현자를 만난 느낌이었다. 3년이 지난 지금, 이 말을 다시 끄집어 내니 많은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삶에 있어 많은 선택을 할 수 있고, 기회비용도 작지만 확실히 점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많이 생겨나고 있는 것은 맞는 것 같다. 학생 때는 뭐든지 다 해볼 수 있었는데, 요즘은 많이 망설여지는 순간이 많다. 다시 돌아가는 것은 늦었다는 것을 알기에, 언제나 다시 돌아갈 수 있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나는 그리워하는 것이 아닐까.



  푸엔테를 지나 에스테야로 가는 길은 정말 너무 더웠다. 정말 더웠고, 새벽 5시부터 걷기 시작해 다리랑 어깨가 많이 아파왔다. 오늘 48km를 걷기로 목표로 새웠는데, 이 더위에 내가 미쳤지.... 결국 41km만 걷고 Lorca라는 작은 도시에서 멈췄다.

 걷다가 산티아고까지 676km가 남았다는 표지를 보았다. 총 30일 중에 이제 4일째 걷는 날이지만 아직 백의 자리에 '6'이라는 숫자는 한없이 크게 느껴졌다. 

왼쪽, 중간 : 676km남았다는 노란색 화살표,  오른쪽. 오늘의 알베르게.

 

 오늘 알베르게에서는 새로운 사람들과 순례자의 메뉴를 먹었다. 한국인 형 한 명과, 체코의 Mark, 이탈리아의 Gabor Papp라는 사람과 같이 저녁식사를 했다. 각자 온 이유와 사소한 이야기들은 나누면서, 내 피곤함과 통증, 근심들은 가벼운 웃음으로 피어났다. 그렇게 웃으며 우리는 와인을 엄청나게 많이 먹었다. 


 술을 먹고 한국인 형이랑 밖에서 쉬면서 '용서의 언덕' 이야기를 했다. 알고 보니 이 형은 6년 동안 만났던 여자 친구가 있었는데 헤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 이 언덕에서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며 나를 용서하고, 너를 용서하고, 우리를 용서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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