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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홍 Oct 11. 2021

산티아고 순례길, 나헤라~라데실라, 33.1km

11. Day8, 혼자이면서도 함께 가는 길

 빨리 걷는 사람은 혼자 걷고, 멀리 걷는 사람은 함께 걷는다.


 어제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아침부터 무거운 몸을 이끌고 겨우 나왔다. 어제 나헤라에서 불꽃놀이 축제가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불꽃놀이도 구경하러 갔다가 늦게 들어왔지만, 나는 이미 취해서 보지도 못하고 뻗어버렸다.


 오늘은 아침부터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어제 혼자만 다닌다는 깨달음을 얻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끝까지 걸어보기로 했다. 처음부터 같이 걸었던 누나 두 명과 동생과 함께 같이 걸었고, 쉴 때도 다 같이 쉬었다. 이렇게 같이 걷는 날 날씨가 좋아야 하는데 날씨는 정말 안 좋았고, 지금까지 걸었던 날 중에 가장 추운 날이었다. 사진도 몇 번 찍었지만 잘 나온 사진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좋았다. 그동안 걷기만 하느라 별로 하지 못했던 얘기를 실컷 하면서 같이 걸었다. 서로 이 길을 오게 된 얘기, 한국에서의 직장 생활 이야기, 꿈 얘기, 길 얘기, 연애 얘기 등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실컷 했다.

나 홀로 있는 낯선 공간에서 사람들을 만나며 이야기하다 보면, 나의 걱정과 고민은 가벼운 웃음으로 바뀐다.


 여행을 하다 보면 사람들을 만나며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신기하게 여행 중에 만난 사람과 이야기할 때면 그동안 한국에서 꺼내지 못했던 나의 속마음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서 나의 고민과 걱정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웃으면 넘길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 순례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이 길 위에서 만난 사람이지만 어느 친구들보다도 나의 속마음을 더 많이 공유하고는 했다. 그러면서 공감대가 형성되고 관계를 쌓아간다. 그리고 같은 걸음으로 걷게 되고, 같이 쉬게 된다. 이곳 산티아고 순례길은 처음에는 혼자 시작해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끝나게 된다. 그러기에 함께이면서도 혼자이고, 혼자이면서도 함께인 길이 결국 산티아고 순례길인 것이다.


 우리 삶도 따지고 보면 혼자인 것 같기도 하면서도 함께인 것 같기도 하다. 함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혼자일 때가 많고, 어떨 때는 혼자인 것 같지만 사실 함께인 경우가 많다. 주변에 친한 친구들이 있고, 함께 놀 애인도 있긴 하지만 사실은 혼자라고 느낄 때도 많다. 반대로 늘 혼자서 열심히 삶이 나에게 던져놓은 과제를 해쳐나가기도 하지만, 사실은 늘 나를 도와주는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인생은 이 산티아고 순례길과 참 비슷한 면이 많다.



 오늘 걸었던 길은 지금까지의 길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동안은 중간중간에 언덕도 있고, 길도 있고, 산도 있고 그랬다면 오늘은 유독 직선 길이 많이 나왔다. 또 밀밭과 유채꽃?처럼 보이는 노란 꽃도 있었다. 노란 꽃과 밀밭은 전에도 있었지만 이렇게 직선 길에서 각이 져있는 길은 처음이었다.


 걷다가 동생의 다리가 점점 안 좋아졌다. 사실 며칠 전부터 안 좋긴 했는데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나랑 누나는 좀 더 쉬었다 가자 하고, 가방을 다음 숙소에 미리 보내는 게 어떻겠냐고도 얘기했지만 끝내 괜찮다고 하면서 함께 걸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배낭을 메고 두 발로 걷겠다는 초심자의 약속을 어기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았다.


 순례길을 걷다 보면 다리에 이상이 생겨 못 걷는 사람들이 많다. 한국에서는 몰랐지만 여기에 와서 무거운 배낭을 메고 길 아닌 길을 걷다 보면 발에 많은 무리가 간다. 그리고 평소에 걷는 습관이 잘못된 걸음걸이인 줄 모르고 걷다가 이곳에 와서 평소 습관대로 걷다 보니 발에 물집이 잡힌다. 알베르게 도착해서 순례자의 맨 발을 보면 물집이 심하게 잡혀 있는 경우가 꽤 있다. 그리고 손톱깎이나 바늘을 이용해 물집을 터트리고, 바늘과 실을 연결해 물집에 잡힌 짓물를 흘려보내는 경우가 많다. 그 사람들 나름대로 큰 고생을 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에 비해서는 나는 꽤 잘 걷는 편에 속했다. 다행히 8일 차가 될 때까지 물집이 잡힌 적도 없었고, 다리랑 어깨가 아픈 것도 상대적으로 금방 회복되었다. 이렇게 건강한 두 다리와 몸이 있다는 것에 다시 한번 감사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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