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Day11, 대도시 부르고스
내 인생에도 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순례길의 노란 화살표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오늘은 대도시 부르고스로 가는 날. 14km 정도밖에 안 되는 짧은 거리여서 그냥 지나칠까 했지만, 부르고스가 정말 유명한 도시라고 하기에 하루 머물기로 했다. 날씨는 여전히 추웠다. 어제 영하 온도에 비해서는 훨씬 나았지만 여전히 추웠다.
11일째, 이제 걷는데도 불편함이 없고, 어깨가 아프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배낭의 무게가 내 몸에 고스란히 느껴져 걸을 때마다 조금 통증이 있었지만 이젠 그런 것도 모두 사라졌다. 길을 걷는 동안 내 스스로 "끝까지 잘 걸을 수 있을까?"라는 길이 던지는 도전에 물리적으로 맞서 싸우고 있었고, 해낼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몸은 이제 시험을 통과한 것 같으니 이제 마음만 통과하면 되겠구나 싶었다.
한 시간쯤 걷다가 두 갈래 길이 나왔는데 노란색 화살표가 없었다. 내 앞에는 사람이 안 보여 어디로 가야 할지 망설여했는데 내 뒤의 외국인들은 왼쪽으로 갔다. 잠시 고민하다가 오른쪽 저 멀리에 노란 화살표가 있는 것 같아 오른쪽으로 갔다. 걷다가 뒤를 돌아보니 저 멀리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다행히 조금 걷다가 노란색 화살표를 볼 수 있었다.
노란색 화살표. 순례길에서는 항상 우리를 안내해주는 노란색 화살표가 있다. 800km나 되는 거리를 이 노란색 화살표만 믿고 걸으면 된다. 순례길에서는 매일매일 강력한 목표에 이끌리는 듯한 기분이 들곤 한다. 전날 밤에 다음날 어디까지 갈지를 정하고, 길가에 있는 수없이 많은 노란 화살표만 믿고 따라가면 됐다.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가 명확했다.
일상에서도 노란 화살표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성인이 된 학생 때부터 내가 무언가를 선택할 때마다, 그리고 지금 나를 기다리고 있는 무수히 많은 선택지에 노란 화살표처럼 내가 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수없이 많이 했다.
이날 부르고스 내부로 들어가는 길은 정말 재미없었다. 1시간 넘게 걸어갔는데, 대도시로 들어가는 길은 항상 볼거리가 별로 없나 보다. 11시쯤 부르고스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했는데, 다행히 12시에 문을 열었다. 이 알베르게는 150명을 넘게 수용하는 숙소인데, 굉장히 깔끔한 알베르게였다. 짐을 풀고 부르고스 시내 구경을 했다.
부르고스. 스페인 북부 코스로 여행을 하는 사람이라면 꼭 들르는 곳이라고 한다. 도시 규모도 그렇고 여기에 있는 부르고스 대성당은 스페인의 3대 대성당 중 하나이다. 고딕 양식을 대표하는 성당이고, 웅장함은 어느 다른 성당에도 뒤지지 않았다. 이 성당 주변에서만 수십 장의 사진을 찍었고, 부르고스 전경을 볼 수 있는 언덕에서도 이 성당의 웅장함은 대단했다.
성당 내부를 구경하기 위해서는 4.5유로를 내야 했는데, 그래도 유명한 관광지에 대성당이니 한 번 들어가 보기로 했다. 내부의 화려한 조각물들을 본 순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도시 속에서, 알베르게에서 다시 많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사진 찍는 일을 하는 여자애와 같이 온 남자 친구, 연극영화과 친구, 계속 같이 걸었던 누나와 다리가 다 나아서 돌아온 동생 등 그동안 스쳐 지나가며 만났던 친구들이었다.
내일은 드디어 순례길에서 유명한 메세타 평원을 걷는 날이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시골길에 마치 고행길을 걷는 듯한 순례자의 사진이 많이 나오는데 바로 그 길이다. 200km가 평원이라 지루하다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 사진을 보면서 꼭 한 번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내일부터 펼쳐지는 그 광활한 평원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설렘으로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