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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원준 Oct 08. 2019

육아휴직이 처음은 아닙니다만...

"너 육아휴직 한다며?"


오랜만에 마주친 타 부서 팀장님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당시 그 장소가 퇴근하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엘리베이터만 아니었더라 얼굴이 붉어지는 느낌까지는 받지 않았을 텐데.

"하하. 네. 그렇게 됐어요."

멋쩍게 웃으며 작은 목소리로 겨우 대답을 하고 나니 함께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던 선배들도 한 마디씩 건넸다.  


"아, 그래? 잘됐다~"
"이번이 두 번짼가?"
"이참에 첫째 때 남은 것까지 다 써버려!"

그렇게 조성된 호의적인 분위기 덕에 살짝 달아올랐던 얼굴의 열기는 금세 가라앉았다. 그리고 새삼 실감이 났다. 두 번째 육아휴직, 정말 하긴 하는구나.




첫째에 이어 둘째를 위해 육아휴직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사실 오래전부터 하고 있었다. 시기는 아내의 복직 시점에 맞추고, 최소 6개월 전에는 회사에 미리 알린다는 세부적인 계획도 세워 놓았다.


그런데 회사에만 가면 참,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첫 번째 육아휴직에서 복귀한 지 2년도 되지 않았는데 '또' 휴직을 하겠다는 얘기가 마음 편히 입 밖으로 나올 리 없었다. 게다가 최근 신규 프로그램 제작에 투입된 상황이라 지금은 휴직 얘기를 하기에 좋지 않은 타이밍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눈치를 보는 사이 D-6개월 선이 무너지고 D-5개월로 접어들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같이 일하게 된 선배에게 먼저 얘기를 꺼냈다.


"선배, 사실 저 내년에 육아휴직 계획이 있어요."
"아, 그래? 언제?"
"내년 초요. 아, 그런데 팀장님께 말씀을 잘 못 드리겠네요."
"뭐 어때, 얘기해~ 그런 거 못쓰게 할 분들 아니잖아?"


그랬다. 첫 번째 육아휴직을 결심했을 때도 흔쾌히 들어주시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가족이라며 내 뜻을 지지해주신 팀장님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이번에는 왜 이렇게 말을 꺼내기가 힘든 건지. 이번이 두 번째라는 것도 있었지만 사실 내가 남자 직원이라는 점이 더 신경이 쓰였다. 흔치 않은 일임은 분명하니까.


그러다 9월의 마지막 금요일이 됐다. 10월이 되기 전에는 꼭 말씀드리고 싶었다. 출근길 발걸음이 무거웠다. 오만 가지 생각이 들었다. 언제 이야기하지? 어떤 말로 시작하는 게 좋을까? 어떻게 확실히 의사전달을 해야 할까? 안된다고 하시면 어떻게 반응해야 하지?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어느덧 나는 사무실 내 자리에 와 있었다. 오전 내내 고민의 시간이 이어졌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오후 네다섯 시 즈음, 퇴근을 앞둔 시간을 노려보기로 하고 최대한 마음을 편히 가지려 노력했다.


구내식당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은 뒤 돌아왔는데 그날따라 어쩐 일인지 팀장님과 나, 둘만 사무실에 있게 됐다. 내적 갈등이 시작됐다.

'지금인가...? 좀 더 기다려 볼까...?"


복잡한 마음에 일단 화장실로 가 칫솔질을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신기하게도, 결심이 섰다. 에라, 어차피 할 거 지금 말해버리자! 호기롭게 입을 헹구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팀장님에게 직진, 면담 신청을 했다.


"팀장님, 지금 잠깐 시간 괜찮으세요?"
"응. 그래."


팀장님은 으레 있는 일이라는 듯 익숙한 표정으로 대답하시고는 일어나셨다. 함께 회의실로 들어갔다.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응."
"아내가 내년 3월이면 복직하는데, 둘째 문제가 있어서요. 상의를 해봤는데 아무래도.. 제가 둘째를 보는 게 제일 낫다는 생각이어서, 육아휴직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끄덕끄덕) 음... 그래. 애들이 제일 중요하지 뭐. 그럼 내년 3월부터? 얼마나?"
"1년이요."
"그래. 내년 사업 계획 세울 때 고려해서 짜야겠네. 알겠어. 애들이랑 보내는 시간이 제일 소중한 거니까. 너는 한번 해봤으니까 알잖아?"
"네. 감사합니다."


그동안 했던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팀장님 반응은 매우 긍정적이었다. 금세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팀장님의 이야기에 내가 정말 괜한 눈치를 보고 있었던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뭐 그런 얘기를 이렇게 죄지은 사람처럼 어렵게 하냐. 어차피 법적으로 보장돼 있는 거잖아? 육아휴직은 네 권리야."
"그래도  입장에선 죄송한 마음이 들긴 하죠. 복직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다들 바쁜 것도 뻔히 아는데..."
"괜찮아. 당연한 건데 뭐. 지원팀에도 미리 얘기해줘."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래."


면담은 5분 정도로 짧게 마무리됐다. 아니, 대화를 편하게 이끌어주신 덕에 그렇게 금방 지나간 것처럼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실제로는 10분, 15분이었는지도.


회의실을 나오니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홀가분했다. 아내에게도 이 소식을 전했다. 내가 결국은 육아휴직을 쓸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해도 이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진작 얘기할 걸.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다.




나는 누구의 눈치를 보고 있었던 까? 그동안 내가 눈치 보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은 정작 내가 어렵게 얘기를 꺼냈을 때, 흔쾌히 들어주었고 격려하며 응원해주었다. 동료들, 선배들, 팀장님까지.


알고 보면 나는 나 자신을 스스로 검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남자가 마음 놓고 육아휴직을 신청하고 사용할 수 있는 사회. 모두들 그런 사회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데, 오히려 그들보다 내가 더 보수적이었던 건 아니었을까.


'그들이 보수적일 것이기 때문에 얘기하기가 힘들다.'라고 생각하는 건 어쩌면 자신감, 용기의 문제가 아니라 '나는 진정으로 변화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육아휴직 얘기를 꺼낼 분위기가 아니다, 아마 안 될 것이다, 얘기했다간 본전도 못 건질 것이다... 속단하지 말아야 한다. 막상 육아휴직에 대한 뜻을 밝혔을 때 유연한 자세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지 모른다. 그러니 먼저 말이라도 꺼내봐야 한다.  스타트를 끊는 건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으니.


어렵게 얘기를 꺼냈는데, 거절당하면 어떡하냐고?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아빠들이 해야 할 일은 '내가 이 회사의 직원이지만 가정에선 아빠이기도 하다.'라는 목소리를 냄으로써 육아휴직에 관한 공을 회사에 넘기는 것이다.


육아휴직은 쓰지 않고 그냥 넘겨버리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권리다. 월급쟁이에게 이렇게 긴 시간, 가족과 함께 할 시간이 언제 또 주어지겠는가. 퇴사를 하지 않는 한 없다. 모든 아빠, 예비 아빠들이 꼭 사수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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