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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원준 Oct 17. 2019

할머니에 대한 너의 진심

딸에게 보내는 편지 #8

오랜만에 부산에 계신 할머니께서 서울에 오셨어. 할머니의 오랜 친구분들과 약속이 있셨는데, 오신 김에 우리 얼굴도 잠깐 보고 가신다고 하셨지.


예전에도 우리를 만나러 서울에 오 때면 겸사겸사 친구분들을 만나곤 하신 할머니였지만, 우리와의 약속 때문에 항상 은 시간을 함께하지 못하셨던 게 아쉬우셨었나 봐. 


아빠는 할머니에게, 이번엔 친구분들과 재미있는 시간 충분히 보내시고 부산으로 돌아가시기 전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말씀드렸어. 그러는 동안 너는 엄마와 처음으로 동네 도서관엘 다녀왔지. 아빠는 주말 동안 감기에 걸려 네 동생과 하루 종일 집에서 있어야 했어.


할머니와의 만남,
그리고 괜한 걱정거리 하나


한 네 시쯤 됐으려나. 엄마와 네가 집으로 돌아왔고, 곧 할머니에게도 전화가 왔어. 지하철을 타고 우리 집 쪽으로 출발하신다는 거였어. 시간 계산을 해 보니까 45분 정도 걸린다고 나와서 우리는 부랴부랴 나갈 준비를 했. 얼핏 보면 여유 있는 시간이었지만 너희 둘을 데리고 나가려면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했거든.


할머니와 집 근처 백화점에서 만나기로 하고, 얼른 차를 몰아갔어. 그런데 한 가지 사소한 걱정거리가 있었어. 혹시 네가 쑥러워서 할머니에게 잘 가지 않으려고 하면 어떡하나 하는 거였지. 간간이 할머니와 영상통화를 하지만 실제로 네가 할머니를 직접 보는 건 일 년 중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까 말이야.


잠시 후 백화점 로비에서 기다리고 계신 할머니를 만났을 때, '아빠가 괜한 걱정을 했구나' 생각하게 됐어. 너는 할머니를 보고 아주 조금 낯을 가리는가 싶더니 금세 방긋방긋 잘 웃어주더구나. 왼손으론 할머니 손을, 오른손으로는 엄마 손을 잡고 걸어가는 모습이 아빠는 참 보기가 좋았다.


카페에서 잠깐 시간을 보낸 뒤 우리는 저녁을 먹으러 갔어. 너를 어디에 앉히는 게 좋을지 몰라 아빠가 너에게 물었어.


"어디 앉을 거야?"

"나 할머니 옆에 앉을래!"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아빠너의 대답이 참 크게 들렸다. 자주 못 봐서 어색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할머니지만 그래도 그렇게 웃으며 친근하게 대해주는 네가 대견스럽고 좋았던 거지. 물론 그렇다고 밥 먹기를 거부하 계속 장난을 치 네 본래 모습이 어디 가진 않았지만 말이야.


너도 너였지만 동생이 칭얼대는 탓에 우리는 밥을 여유 있게 먹진 못했어. 엄마와 아빠가 번갈아가며 동생이 탄 유모차를 끌고 식당 밖으로 나가보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잘 기미가 보이지 않았지. 결국 우리는 할머니를 기차역에 일찌감치 모셔다 드리기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어.


너의
두 번째 선택


그런데 기차역에 모두 다 같이 갈 수는 없었어. 동생도 동생이었지만 그날 너도 낮잠을 자지 않고 계속 놀아서 그런지 피곤해하는 게 보였거든. 아빠 혼자 할머니를 배웅해드리고 너는 엄마, 동생과 함께 같이 집에 먼저 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어.


한편으론 엄마 혼자 너희 둘을 보게 하는 것도 마음에 걸렸는데, 그래서 아빠는 또 너에게 선택권을 줬어.


"너 할머니 기차 타시는 거 보러 갈? 아니면 엄마랑 동생이랑 먼저 집에 갈래?"


조금 고민하는가 싶던 너는 금세 입을 열었어.


"할머니 기차 타는 거 보러 갈래."


가는 길에 네가 차 안에서 잠들지 않을까 싶었는데, 어쨌든 할머니에게 너를 조금 더 보여드릴 수 있어서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그렇게 기차 출발 시각 1시간 여를 앞두고 우리는 수서역으로 가게 됐단다.


역시나, 수서역에 도착했을 때 너는 잠이 들어 있었어. 다행히 유모차 한 대가 트렁크에 실려있어 너를 거기에 앉혀줄 수 있었지. 그러면서 잠이 슬쩍 깨는가 싶었는데 역 안으로 들어가니 완전히 눈을 똘망똘망하게 뜨고 있더구나. 그리고 너는 언제 잠들었냐는 듯 역 대합실 여기저기를 누비며 신나게 놀았어.


그때 너는 새로운 곳에 와서 마냥 신났던 걸까? 아니면 할머니랑 곧 헤어진다는 걸 알아서 일부러 더 밝게 있으려 노력했던 걸까? 물론 전자일 가능성이 크지만, 불과 몇십 분 후 네가 보였던 모습을 다시 떠올리니까 아빠는 그냥 그런 의문이 들었어.


'기차'를 택했던
너의 속마음


기차 출발 시각이 다 되어서 우리는 할머니와 함께 승강장으로 내려갔어. 할머니가 타실 기차 칸 바로 앞까지 가서 배웅을 해드렸지. 기차 앞에서 할머니와 너, 둘만 나오도록 사진도 찍고 서로 인사하며 시간을 보냈어. 그런데 넌 어쩐 일인지 갑자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어. 중얼중얼 뭐라고 얘기하기에 아빠는 귀를 갖다 댔어.


"나도 기차 타고 싶어..."


기차를 보면 왠지 네가 한 번은 그 얘기를 할 것 같다고는 생각했었는데 이번에도 역시나, 아빠의 예상이 적중하는 듯했어.


아빠는 장난치듯 물었어.


"기차가 타고 싶은 거야, 아니면 할머니랑 헤어지기 싫은 거야?"


아빠가 물으니 너는 입을 삐죽 내밀고 대답했어.


"할머니랑 헤어지기 싫어..."


그때 아빠는 아차 싶었어. 그 질문에 네가 울먹거리며 대답을 하리라곤 예상치 못했거든. 네가 진심으로 서운해하고 있다는 마음이 느껴지니까 정말 순식간에 눈시울이 붉어지더라. 


거참. 지금 생각하니 부끄럽네.


출발 5분 정도를 남기고 기차에 올라타신 할머니는 창문 너머로 너를 한참 쳐다보셨어. 아무래도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는 네가 마음이 쓰이셨나 봐. 할머니는 곧 아빠에게 전화를 하시고는 너를 바꿔달라셨지.


전화기를 받아 든 너는 할머니 말씀을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가끔 "네... 네..." 하고 대답할 뿐이었어. 무슨 대화가 오가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모습을 보다가도 아빠는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참느라 혼났다. 그날따라 왜 그렇게 네 표정이  보이던지. 전화를 끊고, 서운해하는 너에게 다음에 꼭 엄마 아빠랑 부산에 놀러 가자고 약속을 했어.


너를 달래주는 사이 기차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우리는 서로 마지막 인사를 나눴어. 너도 힘이 없어 보이긴 했지만 할머니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어.


멀어지는 기차를 보고 있는데 할머니도 우리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내리지 않으시더라. 얼마나 발걸음이 무거우실까 생각하니 또  번 찡했네. 아빠는 그래도 그때까진 덤덤했어. 그런데 네가 결정타를 날리더구나.


할머니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마자 너는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 '이 녀석이 할머니 앞에선 울지 않으려고 참았나 보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아빠도 감정이 올라왔어. 게다가 자주 보지 못하는 할머니, 아니 아빠의 엄마에게 너도 사랑을 많이 느끼는 것 같아서, 그런 감정이 있음을 보여줘서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아빠도 모르게 너를 따라 울어버렸나 보다.


집에 와서 엄마에게 이 얘길 했더니 "자기는 거기서 왜 울어?ㅎㅎ" 하며 아빠의 넘치는 감수성에 감탄을 금치 못하더구나. 벌써 걱정할 건 아니지만 나중에 너 결혼할 땐 아빠가 통곡을 할지도 모르겠다. 안 그래야 할 텐데.


어쨌든, 머니가 매번 한나절은 함께 시간을 보내고 가시다가 이번몇 시간 만에 가셔서 많이 서운했지? 비록 떨어진 곳에 계시지만 자주 만날 수 있게 아빠가 애써야겠고 생각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지금의 너에게 할머니는 과연 어떤 존재일지 궁금하다. 자, 글을 다 읽었으이제 아빠와 함께 할머니 얘기를 한 번 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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