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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원준 Jan 28. 2020

목적지는 없어도 괜찮다. '시동'만 걸 수 있다면.

영화 <시동> 리뷰

* 영화 내용이 포함된 리뷰입니다.
* 글에 언급된 영화 대사는 오로지 기억에 의존한 것으로 실제 영화 속 대사와 정확히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정정 댓글 환영!)
*모든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

영화 <시동>을 본 날은 1월 1일이었다. 새해 첫날과 동시에 생일을 맞은 나를 배려해주신 장인어른, 장모님 덕분이었다. 아이 둘을 두고 아내와 단 둘이 외출해 영화를 보는 게 얼마만이었던지. 기분이 좋았던 만큼 영화도 더할 나위 없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나는 언제부턴가, 영화를 보고 나면 반드시 리뷰를 써서 흔적을 남겨왔다. 때로는 에버노트에, 때로는 블로그에, 또 어떨 때는 브런치에, 그때그때 내 구미가 당기는 대로 어떻게든 글을 썼다.

이렇게 얘기하니 내가 엄청난 영화 광인 데다, 리뷰를 기가 막히게 잘 쓰는 사람인 것만  같다. (이 글만 봐도 그런 게 아니란 걸 금세 알 수 있을 것이다.)


아이 둘 아빠에게는 영화를 볼 기회가 그리 많지 않다. 1년에 네다섯 편쯤 될까. 어쨌든 이 점을 고려한다면 영화를 보고 무조건 감상평을 쓴다는  나에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본 지 한 달이 다 되어가는 영화 <시동>에 대한 글은, 이상하게 잘 써지지가 않았다. 시간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고, 영화에 대해 쓸 거리가 없었던 것도 분명 아니었다. 문제는 내가 쓰려고 했던 주제에 대한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았던 데 있었다. (지금도 어떤 글을 써야 할지 잘 모르겠다.)

'영화 <시동>은 그냥 유쾌한 코미디 영화일 뿐인데, 무슨 정리할 생각이란 게 있느냐?'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어느 정도는 동의한다. <시동>에 대해 '가볍게 웃으며 볼 수 있는 영화'라고 평하는 사람들을 적지 않게 접할 수 있었고, 나 또한 영화를 보고 난 뒤 웃으며 영화관을 나섰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계속해서 뇌리를 떠나지 않는 영화 속 대사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내가 보기에 꽤 의미심장한 것이, 나로 하여금 <시동> '그저 그런 코미디 영화'로만 느껴지지 않게 했고, 리뷰 글을 쓰는 것도 어렵게 만들었다.

대강 '영화가 이러저러해서 재미있었습니다, 여러분!' 하고 글을 털어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게 썩 내키지 않았던 거다. 뭔가 의미를 담은 리뷰가 되어야 할 것 같아서, 그래야 영화 <시동>에 어울리는 리뷰 글이 될 것 같아서였다.


내가 주목한 장면 #1


나를 고민하게 만든 영화 속 대사는, 노란 머리를 하고 인생 연기를 보여 준 박정민(택일)의 입에서 먼저 나왔다.

절친인 상필(정해인)이 '어울리지 않게' 사채업자 뒤치다꺼리를 하게 되자 그를 나무라며 했던 말이었다.

"너한테 어울리는 일을 해, XX야~"

영화에 딱 한 번 나왔다면 크게 의미 부여하지 않고 넘어갔을 만한 대사였다. 하지만 이 '어울리는 일'이라는 말은 영화 <시동> 곳곳에 배치되어 있던, 꽤 중요해 보이는 표현이었다.


내가 주목한 장면 #2


빌려준 돈을 받으러 다닐수록 점점 험악한 꼴을 겪게 된 상필(정해인). 두려움에 떨며 사장을 찾아가 일을 그만두겠다고, 더 이상 못하겠다고 이야기한다.

상필에게 처음 일을 소개해준 동네 형 동화(윤경호)는 이렇게 얘기하며 호통친다.


"누구는 안 무섭냐? 열심히 하다 보면 잘하게 되는 거고, 그러면 그게 너한테 어울리는 일이 되는 거야!"


내가 주목한 장면 #3


조폭의 세계를 떠나 조용히 숨어 지내며 중국집 주방장의 삶을 살아가던 거석이형(마동석).

그에게 옛 부하 조직원 태성(박해준)이 찾아와 일을 도와달라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형님, 어울리는 일을 하세요. 차 한 대 놓고 갈 테니까 그거 타고 올라오십."




'어울리는 일'이란 말이 나온 장면은 이렇게 내가 기억나는 것만 세 번 있었다. 이쯤 되면 의도된 대사라고 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럼 감독의 의도대로, 생각에 잠겨 보는 게 인지상정일 것이다.


어울리는 일


그 '어울리는 일'이란 건 무엇일까. 어떤 일이 나에게 어울리는지 아닌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 걸까. 어떻게 판단을 내려야 맞는 걸까.

이에 대한 답을, 나는 영화 속에서 찾아보려 했는데 쉽지 않았다. 처음엔 '누가 뭐라 하든 내가 스스로 선택한 일이면 괜찮은 것 아닐까?'라고 생각했지만, 영화 그렇게 말하지 않는 듯했다.

절친인 상필(정해인)을 보는 택일(박정민)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고리대금을 받으러 다니는 험악한 일은, 평범한 청년이었던 상필에게 '어울리는 일'이 아니었던 거다.

"하다 보면 잘하게 되고, 어울리는 일이 된다"던 동네 형 동화의 말도 빗나갔다. 상필에게 그렇게 충고했던 본인조차도, 결국 사채업을 떠나 순박한 얼굴의 치킨집 사장님이 되었다. 그리고 그게 더 '어울리는 일'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나에게 어울리는 일은 무엇인지 판단할 때, 다른 사람의 조언, 충고를 받아들이는 게 현명한 것이냐는 문제가 남는다. 옛 부하 조직원(박해준)의 말을 따라 중국집 주방을 홀연히 떠나버린 거석이형(마동석)처럼 말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 또한 정답이라 말하지 않는다.

과거 몸담았던 조직이 겪고 있는 현재의 문제를 말끔히 해결해 주고 돌아오는 길. 거석이형은 자신에게 "어울리는 일을 하라"며 찾아왔던 부하 조직원을 데리고 한 중국집으로 들어간다. 느닷없이 주방 한편을 차지하고는 후배에게 손수 만든 짜장면 한 그릇을 대접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먹어 봐. 형 이제 이런 거 만드는 사람이야."

부하 조직원은 허탈함에 짜장면을 한 젓가락도 들지 못지만, 그 말을 한 거석이형은 참 행복해 보였다. 나에게 어울리는 일을 정하는 사람을 그 누구도 아닌, '나'여야 한다는 것. 이야기는 이렇게 결국, 다시 '나'로 돌아온다.

하지만 말이 쉽지, '어울리는 일'을 찾는다는 건 현실에서 꽤나 어려운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직업을, 직장을 구하고도 방황한다. 막상 일해 보니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며,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인 것 같다며 그만 둘 생각을 한다.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조차 모르겠다며 절망하기도 한다.

그런 이들에게 영화 <시동>은 마지막 장면에서 현실적인 위로를 건네는 듯했다. '스스로 시동만 걸 수 있다면, 때론 목적지가 없어도 괜찮다'며 말이다.


택일 : (오토바이 헬멧을 건네며) 타시죠.
정혜(택일 엄마) : 어디로 가는데?
택일 : 엄마 가고 싶은 곳.
정혜 : 목적지는 있어야 될 거 아냐.
택일 : 간다.


한 달을 가까이 미뤄왔던 리뷰 글을 드디어 마무리했다. 홀가분하다. 이게  영화 <시동>에 어울리는 리뷰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글'이란 것도 때로는 무슨 이야기를 쓸지, 목적지가 없어도 괜찮지 않을까. 글도 일단 쓰는 것, 시동을 거는 것이 중요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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