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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원준 Jul 21. 2020

글을 쓰지 않았다면 잊혀졌을 아이의 과거

요즘 체력이 바닥이다. 어깨 근육은 뭉쳐있고 허리와 무릎은 삐그덕거린다. 앉았다 일어날 때면 나도 모르게 "아이고, 아이고" 소리를 낸다. 하루 종일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혼을 쏙 빼놓는 둘째 때문이다.


최근 나를 대하는 둘째의 행동은 혀를 내두를 정도다. 장난감을 가지고 잘 놀다가도 별안간 나에게 달려와 안아달라며 매달리는가 하면, 내가 잠시라도 시야에서 사라지면 울면서 온 집안을 뒤집어 놓는다.


나를 찾아 헤매는 둘째에게 아내가 "아빠 찾는 거야? 아빠 잠시 화장실 갔어~"라고 얘기하면 그제야 진정하고 화장실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린다. 그럴 때마다 나는 둘째에게 "아주 그냥 아빠 화장실도 못 가게 하네!" 하고 괜히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던지곤 한다.


그런 둘째의 모습이 귀엽기도 한데, 한편으론 '얘가 언제까지 이러려나 싶어' 한숨이 나온다. 예정된 육아휴직은 6개월 이상 남았고, 둘째 이름으로 대기를 걸어 놓은 어린이집에서는 언제 연락이 올지 알 수 없다.


현실이 힘들면 과거를 회상하게 되는 법. 문득 둘째가 10개월쯤 됐을 때 브런치에 발행했던 글 한 편이 생각났다. 아이의 모습을 두서없이 나열식으로 기록한 글이었다. 얘가 그때도 나를 이렇게 힘들게 했던가. 그때는 어땠지. 막상 글의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다.


글을 다시 읽어보기 위해 내 브런치로 들어가 스크롤을 조금씩 내렸다. 글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제목이 <10개월 차 둘째에 대한 11가지 기록>이었기 때문에 눈에 잘 띄었다.


글을 읽어 내려가는데, 정말 놀랐다. 당시에 써두었던 둘째에 대한 기록은 20개월인 현재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둘째가 진짜 이런 때가 있었다고?'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완전 정반대의 내용도 있었다. 지금과는 달리 당시엔 엄마 껌딱지였다는 얘기였다.

9. 엄마를 그렇게 졸졸 따라다닌다. 아내 말로는, 둘째와 둘이 있으면 계속 와서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는 탓에 집안일하기가 힘들 정도라고 한다.

둘째를 재울 때도 마찬가지. 아내가 옆에 있으면 자기를 재우고 방에서 나갈까 봐 계속 안긴단다. 엄마가 옆에 있나 없나 확인하는 것처럼. 깊게 잠든 것 같아서 슬금슬금 방에서 나가려고 하면 금세 눈치채고 벌떡 일어난다고.

10개월 만에 아이가 이렇게 바뀔 수 있다니. 아이를 두 명 째 키우는 중인데도 처음 겪는 일처럼 신기했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나와 함께 이 글을 다시 읽은 아내조차도 '둘째가 저럴 때가 있었나' 하며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다.


역시, 이래서 뭐든 글을 써서 기록해 놓는 게 좋다고 하는 모양이다. 스마트폰으로 아무리 많은 사진과 동영상을 찍어둔다 한들 글보다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는 없으니까.


새삼 글을 쓰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쓰지 않았다면 잊혀졌을 둘째의 모습이 내가 쓴 글에서만큼은 생생하게 살아 있으니, 이보다 더 뿌듯한 일은 없을 것이다.




과거의 글에는 둘째의 모습과 함께 기록되어 있는 것이 또 하나 있었다. 내가 둘째에 대해 느꼈던 그 당시의 감정이었다.

10. 나에게는 그런 집착(?) 증세를 보이지 않는 둘째다. 며칠 전 둘째와 나 둘만 집에 있는 날이 있었는데, 아이가 거실에서 혼자 장난감을 가지고 신나게 놀기에 나는 설거지를 편하게 하고 쉬기까지 할 수 있었다. 우연히 그날만 그랬을 수도 있지만, 내 느낌은 그랬다. 둘째는 내가 집에 있는 게 아직 어색하게 느껴지는 게 아닐까.

둘째와 둘이서만 집에 있는 게 어지간히 어색했었나 보다. 그러면서 또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고 싶진 않았는지 괜히 아이 핑계를 댔다.


애가 어색하고 말고 할 게 뭐 있었겠나. 둘째와 하루 종일 붙어 있는 지금 다시 그때를 떠올려 보면, 아이와 둘이 있을 때 어색하다 느 건 나였던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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