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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원준 Sep 14. 2020

브런치보다 세줄일기가 좋았던 이유

뭐... 항상 그렇다는 건 아니고요...^^

지난 목요일 오후, 기다리던 책 한 권이 배송되어 왔다. 설거지를 하고 있던 나를 대신해 아내가 택배를 받았는데, 아내는 영문을 몰라 이게 뭐냐고 물었다.


책은 내가 아내 몰래 주문 제작한 거였다. 나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뚝 뗐다. 아내에게 열어보라고 얘기하고는 설거지를 계속했다.


등 뒤에서 아내가 놀라는 소리가 들렸다. 나름의 서프라이즈였는데, 반응을 보니 만족스러웠다. 나도 빨리 책을 보고 싶었다. 어떻게 만들어져 왔을지 궁금했다. 급히 설거지를 마무리했다.


손에 남아있는 물기를 털어내고 아내 옆으로 가 함께 책을 살펴보았다. 하얀색의 깔끔한 표지와 그 위에 그려진 귀여운 일러스트가 눈에 먼저 들어왔다. 책 크기는 한 손에 가뿐히 들어올 정도로 아담했고 두께도 적당해서 읽기 좋아 보였다. 만족스러웠다.


책의 정체는 육아휴직 후 6개월 간의 이야기를 담은 '세줄일기'였다.

세줄일기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이름으로 SNS의 일종이다. 계정을 만든 뒤 일기책을 생성하면 글을 쓸 수 있는데, 텍스트는 단 세 줄만 입력이 가능하다. 그래서 세줄일기다.


세줄일기에 써둔 글은 한 달에 한 번 인쇄 신청을 할 수 있다. 최소 30페이지 이상이라는 조건만 갖추면 누구나 손쉽게 본인의 이야기를 책으로 간직할 수 있는 거다.


한 편에 세 줄만 쓸 수 있다는 것과 그것을 모아 책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


세줄일기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이 두 가지 포인트에 큰 매력을 느꼈다. 그리고 결심했다. 육아휴직을 하게 되면 그 기간 동안 세줄일기를 매일 쓰기로. 또 그것을 모아 책으로 만들기로.


그런데 막상 일기를 쓰기 시작하니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이게 과연 의미 있는 일일까. 세 줄에 담을 수 있는 얘기도 그리 많지 않을 텐데, 괜히 시간 낭비 하는 거 아닐까. 차라리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좀 더 정성을 들여 브런치 글을 쓰는 게 낫지 않을까. 신이 서지 않았다.


그래도 매일 소소한 일상을 조금씩이라도 기록하는 것의 힘을 한번 믿어보고 싶었다. <매일 아침 써봤니?>라는 책보면 이런 얘기가 나온다. 비범한 삶이라 기록하는 게 아니라 매일 기록하니까 비범한 삶이 되는 거라고.


매일 기록하는 것. 브런치에서는 그게 참 어려웠다. 왠지 모를 부담스러움에 아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세줄일기에서는 가능할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든 글 세 줄을 못 쓰랴. 할 수 있다는 자신감, 그리고 그 기록들이 머지않은 미래에 빚어낼 비범한 삶에 대한 기대감이 샘솟았다.


그렇게 세줄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세 줄만 쓰면 된다고 생각하니 매일 글을 쓰는 데 전혀 부담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글을 항상 쉽게 쓸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기록해두고 싶은 내용을 제한된 글자 수에 맞춰 표현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 나름의 묘미가 있었다. 세 줄에 맞추기 위해 문장에 군더더기가 없는지 살피고, 썼다 지웠다 반복하다 보면 글쓰기 연습이 되는 것 같다. 세 줄의 글에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다는 것도 신기했다.


일기를 쓴 지 6개월이 지났을 무렵, 일기장에는180여 편의 글이 쌓여 있었다. 때가 된 것 같았다. 육아휴직 생활을 중간 정산할 겸, 세줄일기의 결과물을 눈으로 확인할 겸 책 인쇄 신청을 했다. 그 과정 또한 매우 간단했다.


인쇄 분량과 책 표지를 설정하고 배송정보를 입력한 뒤 결제만 하면 끝이었다. 브런치 글을 엮어 책으로 만들 수 있는 '브런치 POD' 서비스와비교 되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세줄일기 책은 개인 소장, 브런치 POD은 출판이라는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겠지만, 개인 소장을 위한 책 인쇄 서비스가 전무한 브런치가 아쉽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세줄일기에서 주문한 책을 받아 들었을 때 세줄일기 서비스에 대한 호감은 더 커졌다. 단순히 책이 깔끔하게 잘 만들어져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소소하다 못해 별 의미가 없어 보이는 글도, 얼마든지 특별한 이야기로 거듭날 수 있음직접 경험했다는 점이 만족스럽고 마음에 들었던 거다.


실제로 나의 첫 세줄일기 책은 시시콜콜한 일상로 채워져 있다. 날씨는 어땠는지, 그날 밥은 뭘 먹었는지, 아이들과 뭘 하며 시간을 보냈는지. 첨부된 사진만 다를 뿐 거의 비슷한 글을 쓴 날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일기를 책으로 만들어 다시 펼쳐 보니 하루하루 특별하지 않은 날이 없 것 같았다. 기록해놓은 이야기만큼은 그것만 보고 당시의 기억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첫째에게도 세줄일기 책을 보여주었다. 책 속에 자기가 들어가 있다며 연신 신기해하고 관심을 보였다. 그 바람에 아내는 결국 180페이지가 넘는 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목이 쉬어가며 읽어줘야만 했다.



 

복직하기까지 5개월. 남은 휴직기간에도 나는 브런치에 글을 쓰는 것보다 세줄일기를 매일 쓰는 데 더 열중할 예정이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책을  받아봤을 때의 행복감을 한번 맛 보았기에 더욱 신경 쓸 것 같다.


그래도 브런치를 냉정하게 외면하진 않을 것이다. 세줄일기가 어쨌건 간에 나에게 '글쓰기의 재미'와 '기록의 맛'을 처음 제대로 느끼게 해 준 건 브런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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