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의 재검 일정은 목요일 오후 3시 30분이었다. 아내는 시간에 딱 맞춰 가면 오래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며 3시가 조금 넘은 시각 첫째와 함께 집을 나섰다. 아이는 엄마 손을 잡고 입을 삐죽거리며 무거운 발걸음을 겨우 옮겼다.
얼마나 가기 싫었을까. 1차 검사의 경험이 있기에 첫째는 더 무서웠을 것이다. 현관문 앞에 서서 아내와 아이를 배웅하는데 코 끝이 시큰거렸다.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그리고 아무 일 없기를 빌고 또 빌었다.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잠시 후 낮잠을 자고 있던 둘째가 깼다. 방에 들어가 보니 아직 잠이 덜 깼는지 훌쩍훌쩍 울며 눈을 비비고 있었다. 조금 더 재워보려고 안아주었는데 어깨에 기대기만 하고 다시 눈을 붙이지는 않았다. 그렇게 10분 정도가 지났을 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현관 쪽으로 나가보니 한껏 풀이 죽어있는 첫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내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검사를 받고 아이가 너무 힘들어해서 집까지 업고 왔다고 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 따위가 정말 몇 사람을 고생시키는 건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도 마지막 고비는 넘겼다 싶어 마음이 놓였다. 정말 끝이 보였다. 물론 그 '끝'이라는 게 코로나로부터의 완전한 자유를 의미하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심리적인 압박에서는 벗어날 수 있으니 얼른 하루가 지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8월 28일 (금)
여느 때와 같이 8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일어나 아침 식사를 했다. 첫째의 재검 결과는 아직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미열이 한 번 있었던 것 말고는 첫째에게 나타났던 증상은 딱히 없었기 때문에 음성이겠거니 하면서도 가슴을 졸이며 보건소로부터의 연락을 기다렸다.
아침 식사를 얼추 마쳤을 때쯤 아내에게 문자가 왔다. 음성이라는 소식이었다. 아내와 나는 격한 소리를 내며 기뻐했다. 지난 2주 동안의 집콕 생활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고생했다며 서로를 격려했다. 가장 힘들었을 첫째의 등도 토닥여주었다.
어린이집 단체 채팅방에서도 다른 아이들의 검사 결과가 하나둘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린이집에서 양성 판정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낮 12시. 공식적으로 자가격리에서 해제되었다. 아이들과 곧장 나갈 준비를 했다. 어디 근사한 데 가서 거하게 외식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코로나 확산세가 심상치 않은 상황이라 그럴 엄두는 내지 못했다. 대신 자가격리 기간 동안 함께 고생해주신 장인 장모님을 뵈러 갈 생각이었다.
운전대를 오랜만에 잡았더니 정말 어색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길거리 풍경들도 괜히 낯설게 느껴졌다. 2주였을 뿐인데 마치 두 달, 아니 2년 만에 밖으로 나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이들을 먼저 처가댁에 내려주고 아내와 나는 근처 백화점으로 향했다. 첫째가 좋아하는 케이크를 사기 위해서였다. '자가격리 해제'라는 것이 일상으로의 완전한 복귀를 의미하는 건 아니지만, 이날만큼은 가족들과 조촐하게나마 자축하고 싶었다.
평일 오후이긴 했지만 백화점은 확실히 평소보다 더 한산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하 1층에 빈틈 없이 들어선 매장들은 모두 불을 밝히고 정상 영업을 하고 있었다. 우리의 일상은 2주 동안 완전히 멈춰버렸었는데. 마치 아무 일 없는 듯 돌아가고 있는 세상이 조금은 야속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그런 생각을 거두었다. 각 매장에서 일하고 있는 모든 직원들의 얼굴에 마스크가 쓰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실내에서 마스크를 쓰고 일하면 얼마나 힘들까. 백화점 내부의 밝은 조명 그 이면에는 방역수칙을 철저히 지키며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던 거다.
현재 전국에 자가격리자가 6만 명 정도 된다고 한다. 거기다 생업을 중단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마스크를 쓴 채로 일터로 나가는 사람들, 그리고 의료진들까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바이러스와 맞서 싸우고 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코로나 사태가 종식되는 그날까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