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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원준 Aug 27. 2020

표출되기 시작한 집콕 스트레스

자가격리 일지 - 5일 차

8월 22일 (토) - 자가격리 5일 차


1.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첫째가 시리얼을 찾았다. 아내와 내가 아침 식사를 밥으로 준비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친 거다. 잽싼 녀석. 집에만 있어서 스트레스 받을 테니 이럴 때 먹고 싶은 거 먹으라면서 순순히 아이 말을 들어줬다.


2. 전날 도착한 택배 중 개봉하지 않은 게 하나 있었다. 그림 그리기 좋아하는 첫째를 위한 선물이었는데, 자유자재로 그림을 그렸다 지웠다 할 수 있는 전자패드였다. 새로 산 레고 블럭을 향한 관심이 분산될까 봐 전날 보여주지 않은 거였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아이가 슬슬 지루해할 때쯤 '짜잔~' 하고 꺼내 주었다.


3. 예상했던 대로 반응이 좋았다. 버튼 하나 눌러서 그림을 깨끗이 지울 수 있다는 게 신기했는지 계속 그림을 그려댔다. 첫째는 이날 하루 종일 옆구리에 전자패드를 끼고 다녔다.


4. 아이들 점심으로는 카레라이스를 해줬다. 아내와 나는 새벽배송으로 주문한 닭갈비 떡볶이를 조리해 먹었다. 아내가 사람들 리뷰가 괜찮다며 주문한 거였는데, 맛있었다. 사실 떡볶이라기보다는 닭갈비에 떡 사리를 넣은 맛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가격도 이 정도면 저렴한 편이고 만족스러웠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격리된 지 일주일 정도 되니 쌓였던 스트레스가 표출되기 시작했다. 나뿐만 아니라 가족들 모두.)


5. 점심 식사 후 아내가 둘째를 재우러 방에 들어갔고 나는 그사이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혼자 남겨진 첫째는 TV를 보고 싶다고 해서 원하는 걸 켜줬다. 설거지를 한창 하고 있었는데 첫째가 소파에 앉은 채로 말했다. 젤리가 먹고 싶다고. 나는 설거지를 거의 다 해가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답해주었고, 첫째는 알았다고 했다.


6. 2, 3분쯤 지났을까. 첫째는 조금 전보다 목소리를 한껏 높여 외쳤다. 빨리 젤리를 달라고. 슬슬 짜증이 났지만 최대한 절제하고 얘기했다. 조금만 기다리라고 방금 얘기하지 않았냐고. 하지만 되돌아온 첫째의 말에 나는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첫째는 이렇게 얘기했다. "빨리 좀 해!"


7. 첫째의 말투엔 장난기가 묻어 있었지만 그 말이 곱게 들릴 리 없었다. 며칠 씩 이어진 격리 생활의 스트레스, 거기에 지금껏 지내온 시간만큼을 격리된 채로 더 살아야 한다는 답답함이 더해져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아이가 툭 던진 말에 감정이 상해버린 거다. 아이에게 그렇게 버릇없이 얘기하는 거 아니라고 타일렀더니 이번엔 아이가 화를 냈다. 자기가 젤리를 달라고 했는데 계속 안 주니까 그러는 거라고.


8. 설거지를 끝내고 첫째를 불러 조금 전 행동에서 뭐가 잘못된 거였는지 다시 일러주었다. 입을 삐죽거리던 아이는 결국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얼른 이 상황을 넘겨 젤리를 빨리 받아내야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9. 아이도 나도, 이 일로 상했던 감정이 말끔히 풀어지지 않았던 건지 우리는 이후에도 몇 차례 더 부딪쳤다.


10. 코로나 시대에는 집에서 취미 생활을 하며 여가를 잘 보내는 것보다, 집콕 생활에서 오는 답답한 감정과 스트레스를 제대로 해소하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한 것 같다.




[자가격리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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