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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원준 Oct 02. 2018

집에 테이프 하나쯤은 있으니까

둘째 아이 출산을 두 달 정도 앞두고, 아내는 잠을 편히 자지 못하고 있다. 몸이 많이 무거워져서 그렇기도 하고, 임신하면 불면증으로 고생하는 경우가 많단다.


아내는 첫째 딸을 재우면서 밤 9~10시쯤 잠이 들어 서너 시간 자다가 새벽에 깬다. 그러고는 날이 밝을 때까지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곤 한다.


2주 전이었나. 주말이었는데, 그날도 아내는 새벽에 잠을 제대로 못 잤는지 내가 깰 때쯤에 다시 침대에 누웠다. 비슷한 시각에 일어난 첫째를 조용히 데리고 거실로 나와 침실 문을 닫아주었다.


육아휴직으로 익힌 ‘아기 혼자 보기 스킬’을 장착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아이 아침밥으로 뭘 줄까?’ 생각하며 냉동실 문을 열어보았다. 한 끼 분량으로 랩에 잘 싸여 있는 약밥들이 보였다. 며칠 전 아내가 정성 들여 만든 뒤 먹기 좋게 보관해놓은 것이었다. 덕분에 따로 식사를 차려야 하는 수고는 덜었다.


하지만 두 번째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밥을 먹이는 것.


세 살배기 첫째 딸 낭콩이는 여전히 밥투정을 한다.  두 돌이 지나면서 과자나 사탕, 아이스크림 등 밥보다 더 맛있는 음식을 하나하나 맛봐온 낭콩이. 의사 표현도 정확하게 할 수 있게 되면서 밥을 거부하는 일은 더 잦아졌다.


그날의 아침 식사도 순탄하지 않았다.


두세 숟갈 잘 먹는가 싶더니 이내 거부하기 시작. 갑자기 우유를 먹겠다, ‘까까’를 먹겠다, 비타민을 달라, 밑도 끝도 없이 떼를 썼다.


‘정색하고 화를 내볼까?’

‘그리고는 그냥 굶길까?’

‘아니면 밥 대신 그냥 시리얼을 줄까?’


아이의 페이스에 말리려는 찰나,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유혹(?)할 만한 뭔가가 없는지.

식탁 위에 스카치테이프가 있었다. 아마 전날 거실에서 사용하고는 아무렇게나 올려놨던 모양이었다.


평소 테이프를 사용할 때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다가와 “나도, 나도~”를 외치던 딸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밥을 먹지 않겠다고 눈물까지 보이기 시작한 아이에게 테이프를 한 조각 뜯어줬다.


“우와~ 낭콩아 이거 봐. 테이프가 여기 있었네?”

(언제나 태연한 척. 연기는 필수다.)


별거 아닌, 말 그대로 정말 테이프 한 조각일 뿐이었다.


하지만 끈적끈적 거리는 것이 신기했는지 아이는 금세, 거짓말처럼 울음을 그쳤다. "또 주세요~"라며 테이프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보이는 낭콩이.


기세를 몰아, 쐐기를 박을 뭔가가 더 필요했다. 그 순간 떠오른 어린 시절의 기억. 테이프로 삼각뿔 모양을 만들며 놀던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손이 가는 대로 막 만들어 봤는데, 얼추 그 형태가 나왔다. 아이에게 보여주니 역시, 냉큼 가져갔다.

사진으로 보니 영 볼품 없...

딸이 테이프를 만지작 거리는 사이 얼른 밥을 떠서 입으로 넣어주었다. 역시, 주는 족족 잘 받아먹었다. 작전 성공이었다.




밥을 먹을 때 아이가 떼를 쓰는 건 대부분 ‘지루함’, ‘심심함’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육아휴직 기간, 경험을 통해 내린 나름의 결론이다. (물론, 밥이 진짜 맛 없어서 그러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사실, 밥상머리에서 장난감을 만지작 거리고 있는 것도 그렇게 보기 좋지만은 않다. 언제까지 이렇게 밥을 먹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하지만 어쩌겠는가.


아이도, 나도, 매번 스트레스 받는 것 보다야 낫지.


아무튼, 육아에 도움이 되는 장난감은 생각보다 멀리 있지 않다는 걸 또 한 번 느낀 순간이었다.


집에 테이프 하나쯤은 있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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