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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원준 Oct 10. 2018

아이가 왼손을 선택했다

피는 못 속인다더니...

딸아이와 가끔 그림을 그리면서 논다. 아이는 아직 동그라미밖에 그리지 못하지만 색연필 잡은 손을 꼼지락꼼지락 움직이는 게 꽤 재미있는 모양이다. 장난감으로 놀 때보다 더 오래 집중하기도 한다.


그런데 펜을 능숙하게 쥐기 시작한다고 느낄 때쯤 아이가 주로 쓰는 손이 왼손이라는 걸 발견했다. 소근육이 채 발달하기 전에는 펜을 제대로 잡지 못했을뿐더러 오른손 왼손, 그때그때 내키는 대로 사용하던 아이였다.

왼손을 사용하게 된 건 순전히, 아이의 선택이었다. 나도, 아내도, 아이에게 펜을 어느 쪽 손으로 잡으라고 가르친 적이 없었다. 어떤 손을 쓰든, 그게 뭐 큰일이라고. 원하는 대로 그림 그리고 쓸 수 있게 되면 그만이니까.


6개월 넘게 다니고 있는 어린이집에서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을 가진 선생님이 있었다면 "펜은 오른손으로 잡는 거야."라고 '고쳐'줬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나 보다. 아이는 그림을 그릴 때 꾸준히 왼손을 쓰고 있고, 밥을 먹거나 양치질할 때에도 오른손보다는 왼손을 더 많이 사용한다.

팽이도 왼손으로 돌리는 낭콩이

아이를 있는 그대로 봐주는 것 같아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시대가 좀 바뀌긴 했나 보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글은 오른손으로 써야 하고, 밥상머리에서는 오른손만 써야 한다는 것이 반드시 지켜야 할 예의, '절대가치'로 여겨졌다.


나도 딸아이처럼, 어렸을 때는 왼손을 선택했었다. 그런데 계속 유지할 수 없었다. 부모님은 왼손을 쓰는 것에 대해 별말씀하지 않으셨지만, 동네 학원 선생님은 나를 '바로잡아' 주려고 부단히 노력하셨다. 글은 오른손으로 써야 하는 거라고, 혼나기까지 했던 것 같다. 흐릿하지만, 그런 기억이 있다.  


결국 나는 오른손잡이로 살고 있다.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큰 불편을 겪은 일이 없다. 세상 모든 것은 '오른쪽'이 기준이니까.


그래도 내면에는 아직 '왼손잡이' 본능이 남아있다. 오른손잡이로 30년 가까이 살았지만 본성은 '고쳐지지' 않았나 보다. 왼손이 편하다고 느끼는 순간이 더러 있다.


예를 들면, 나는 양치질은 무조건 왼손으로 한다. 오른손으로 하면 영 어색해서 칫솔질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휴대폰도 왼손으로 쓰는 게 편하다. 그래서 항상 왼쪽 바지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아이폰에 등록된 지문도 왼손 엄지손가락이 1번이다.


젓가락질은 오른손으로 한다. 하지만 왼손으로 해도 원하는 반찬을 입으로 가져오는 정도는 가능하다. 많이 사용하지 않아서 어설픈 것이지 어색하다고 느끼진 않는다.


'고쳐진' 오른손잡이.


이제 와서 완전한 왼손잡이로 돌아가고 싶다는 건 아니다. 잘 되지도 않을 거고. 다만 자연스럽게, 스스로 왼손을 선택해 성장하고 있는 딸을 보고 있으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역시, 피는 못 속이는 건가' 싶기도 하고, 아이가 앞으로 어떻게 자랄지 기대도 된다.


왼손잡이로 살아간다는 게 쉽진 않아 보인다.


주변을 둘러봐도 왼손잡이는 찾아보기 힘들다. 전 세계로 범위를 넓혀봐도 그 비율은 10~15% 정도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 수가 적은 만큼 불편을 겪는 일도 많은 듯하다. 오죽하면 '국제왼손잡이협회'라는 것까지 생겼겠나.

심지어 '세계 왼손잡이의 날'도 있다. (8월 13일)

하지만 '소수의 인생'을 살 것을 염려해 아이에게 오른손을 강요할 생각은 없다. 왼손 쓰는 게 뭐 별일인가. 그건 어디까지나 아이의 '선택'일뿐이다. 남과 달라 보이고 싶어서라거나, 특별히 오른손이 불편해서 그렇다고 보기도 어려운, 성장 과정에서의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이다. 여기서 내가 부모로서 해야 할 일은 아이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뿐이다.




아이는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을 할 것이다. 나는 과연, 아이가 하는 그 어떤 '선택'도 존중해줄 수 있는 아빠가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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