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잘 놀아주는 아빠다. 스스로 그렇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아이와 놀아주는 데 자신이 있다. 몇 시간이든 하루 종일이든,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건 나에게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일이다.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2017년 육아휴직을 쓰기 전까지만 해도 야근에 시달렸던, 육아와는 거리가 멀었던 아빠였다.
육아휴직은 그런 나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처음엔 아이와 단 둘이, 온전한 하루를 보낸다는 게 어색했고 서툰 점도 많았지만 금세 적응할 수 있었다.
어떻게 해야 아이가 밥을 잘 먹는지, 어떤 놀이에 아이가 흥미를 느끼고 지루해하지 않는지, 경험을 통해 알아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만큼 아이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됐고, 그게 내심 뿌듯했다.
복직을 하고 어느덧 1년이 훌쩍 지났다. 하지만 여전히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퇴근하면 이것저것 다 제쳐두고 아이와 놀아주는 것에 집중한다. 가끔은 내가 아이와 놀아주는 게 아니라, 아이가 나와 놀아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만큼 나는 아이와의 놀이에 적극적이다.
둘째가 태어난 이후 처가댁에서 잠시 지내면서부터는, 조금 더 신경을 썼던 것 같다. 아무래도 둘째에게 손이 많이 갈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서 첫째가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런데 최근 문제가 생겼다. 저녁에 너무 열심히 놀다 보니 아이의 취침 시간이 갈수록 늦어지고 있었던 거다. 9시에서 9시 반, 10시까지 늦어지더니 때로는 11시에 겨우 잠자리에 드는 날도 있었다.
사실, 나는 그게 큰 문제라고 보진 않았다. 일찍 재우기 위해 준비를 하더라도 더 놀고 싶은 마음이 남아있는 아이는 시간을 끌 것이고, 결국은 늦게 자게 될 게 뻔하다고 생각했다. 아이를 일찍 재우는 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본 것이었다.
어차피 일찍 재울 수 없는 거라면, 그냥 맘 편히 더 놀아주면서 아이가 조금이라도 스스로 움직여줄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낫다고 믿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아이를 대했다.
그런데 아내의 상황은 달랐다. 나야 저녁에 실컷 놀아주고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해버리면 그만이었지만, 아내는 아이를 깨워 밥을 먹이고 씻기고, 또 어린이집에 보내야 했다. 그게,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었던 거다.
아이가 늦게 잠드니 다음날 아침 늦잠을 자는 일이 많아져, 시간에 맞춰 어린이집 가기가 힘들다는 게 아내의 설명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둘째 때문에 신경 쓸 일이 많은데, 첫째까지 마음 같지 않으니 아내의 스트레스는 점점 더 쌓여갔다.
게다가 아이가 아침마다 온갖 떼를 쓰며 뭉그적거리기까지 한 모양이었다. 한창 그럴 시기인 데다, 둘째에 대한 질투 때문인지 요즘 들어 더욱 말을 듣지 않는 첫째였다.
통제불능인 아이를 대하다 지친 아내가 어느 날 나에게 볼멘소리를 했다. '아이가 놀다가 너무 늦게 자니까 아침마다 너무 힘이 든다', '다 받아주지 말고 시간 되면 잘 준비를 일찍 시켜달라'는 것이었다.
아내의 힘든 상황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 순간, 나는 나대로 속이 상했다. 아이를 조금이라도 더 배려하기 위해 했던 행동들이었는데,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왔으니 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 믿어왔던 것들이, 잘못된 방식이었던 걸까. 마음이 복잡해졌다.
앞으로 아이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막막했다. 내가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내가 잘못된 거라고 할 수도 없었다. 육아에 그렇게 자신 있던 나였는데 자신감도, 의욕도 뚝 떨어졌다. 아내에게 말했다.
"나 때문에 그런 거면, 그냥 회사에서 일 더하고 애기 자면 들어갈게."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당장 눈앞에 닥친 상황을 모면하고 싶었다. 그리고 - 아내는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 할 일을 싸들고서라도 일찍 퇴근하려 애썼던 그간의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아달라는, 시위(?)의 의미도 있었다. (라고 써놓고 보니 뭔가... 좀 쪼잔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는 동안 바쁜 프로그램 제작 일정 하나가 끝이 났고, 다음 프로그램 준비로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덩달아 마음의 평화도 찾아왔다. 그날 있었던 일을 글로 써야지, 하며 '육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다.
내가 지금껏 '육아'를 '아이와 놀아주는 것' 정도로 여겨왔다는 걸 깨달았다. "아빠는 아이와 잘 놀아주면 되는 거지 뭐~ 별거 있나~" 라며, '육아'를 매우 단순하게 접근했던 거다.
아이와 놀아주는 건 당연히 좋은 일이다. 그것만큼 아이와 교감을 쌓으며 친해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놀아주는 것'에만 매몰되면 안 되겠다, 라는 게 요즘 드는 생각이다.
아이와의 관계에만 집중하다 보면, 주변을 잘 살피지 못할 수 있다. 가령 '아이가 지킬 건 지키며 놀고 있는지', '아내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와 같은 것들 말이다.
아이와 잘 놀아준다고 능사가 아니다. 그렇다고 '육아를 잘한다'라고 마냥 뿌듯해할 것도 아니다. '육아'는 그 중심으로 나 말고도, 많은 주체들이 엮여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혼자만의 것이 아니란 얘기다.
그렇다면 '육아를 잘한다는 건' 뭘까.
너무 당연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육아'를 둘러싼 주체들 즉, '아이를 포함한 나의 가족들이 만족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함께 잘 사는 것' 아닐까.
'육아'라는 단어는 어쩌면 '어린아이를 기른다'는 1차원적인 의미만이 아닌 '가족을 행복하게 한다'는, 좀 더 고차원적인 가치를 포함한 말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