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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마음 한 켠이 시큰했다

40대 회사원의 이야기 - 14. 때 묻은 사람의 이야기

by Heosee

부제 : 때 묻은 사람의 이야기.


"저어~"

"죄송한데요 혹시 핸드폰을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춥고 춥던 어느 겨울밤.

저물어 가는 한 해가 아쉽다며 핑계 삼아 송년회란 이름으로 술자리가 벌어졌다.

"허 과장 마셔마셔, 이거 안 마시면 벌주 2잔"

"네"


정말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내가 술을 먹는 건지. 술이 나를 먹는 건지.

"둘 중 하나는 먹고 있는 거겠지."

알딸딸한 느낌으로 그렇게 일 로서의 "회식"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길.


"수고하셨습니다~"

"그래 그래. 이제 그럼 맥주 한잔 더하러 갈까?"

"아니 왜 이러십니까. 가정의 평화를 지키시러 가셔야죠!"

"어허 네가 언제부터 거역을~야 인마 나떼는 말이야~"


횡단보도 앞에서 의미 없는 실랑이들을 한다.

속으로는 '이제는 집에 좀 가자!' 하고 있지만 역시나 끝까지... (이하 생략)


"자 버스 타실 분들은 이쪽입니다

지하철 타실 분들은 길 건너서 저쪽이고요."

"그래 내일 봅시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렇게 인사를 하고 단 보도 호등만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 때 어리고 앳된 아이가 말을 건다.

"저기~ 죄송한데요"

"네?"

"제기 핸드폰을 잃어버려서요. 휴대폰 한 번만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낯선 아이. 말끔한 행색. 늦은 이 시간.

'어랏 아까봤던 아이 같은데...'

불현듯 기억 나는 것은 아까 나온 빌딩에서 같이 엘리베이터를 탔던 아이다.


'아까 나온 곳으로부터 여기까지 조금 거리가 되는데 우연히 같은 방향으로 온 걸까?

아니면 혹시 따라온 걸까?'

'요즘 핸드폰 잠시 빌려달라고 하고 들고뛴다던데 그런 나쁜 일은 아닐까?'

'만약 도망가면 내가 뛰어서 잡을 만한 체력이 될까?'

'이 늦은 시간이 이 어린 친구가 이곳에 있는 거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걱정과 염려로 내 맘은 갈팡질팡 하고 있었다.

마침 횡단보도에 파란색 불이 들어왔고~

나는 휘말리지 않기 위해 못 들은 척하고 " 자 가시죠~" 하며 일행을 이끌었다.



"자 여기!"

"어서 전화해 봐"

무리 중 선뜻 누군가가 나서서 휴대폰을 건네준다.

잔뜩 긴장한 나와는 달리 온화한 미소로 자신의 휴대폰을 내어줬다.

"네 감사합니다"


휴대폰을 건네들고 전화를 걸어보지만 통화 연결음만 계속될 뿐 전화는 받지 않았다.


"전화 안 받네요. 감사합니다"

"그래 조심히 가라."

그렇게 아이는 떠났고 다시금 횡단보도는 빨간불로 바꿔져 있었다.



세상 창피해졌다.

그저 잃어버린 휴대폰에 전화 한 통 걸겠다고 온 어린아이에게

도둑질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에게 어떤 피해를 끼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못 들은 척 무시하고 가자했던 내가 얼마나 창피하던지.

언제부터 세상에 대한 나의 잣대가 이리 각박하고 메말랐던건지..

마음이 불편했다.


"차장님 왜 빌려주신 거예요?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려고.."

.

"안쓰럽잖아. 우리 애 생각나서 빌려줬어. 우리 애도 핸드폰 잊어버렸을 때

나랑 같이 이곳저곳 다니면서 찾아다닐 때 생각나더라고. 나는 근처 경찰서까지

가서 있는지 찾아봤다니까"


"내 새끼 생각나기도 하고... 혼날까 봐 저렇게 늦게까지 찾고 다니는 건가

신경이 쓰이길래. 집에 가서 안 혼났으면 좋겠네."

"핸드폰 들고 도망가면 어쩌려고요?"

"그럼 머 뛰어서 잡아야지."

"차장님이 저 애를요? 잡을 수 있겠어요?"

"그렇지? 이제 못 뛰겠지? 배도 나오고 이젠 달리기도 안되고...

정 머 하면 휴대폰 하나 버리는 치지 머. 그래도 내 애들 생각나서 잘한 거 같다."


그저 나에게 안 좋은 일에 휘말릴까 봐,

어떤 것도 손해보지 않고 살아야 했던 내 맘이 많이 부끄러워졌다.

나도 어렸을 때 지나가던 어른들에 도움, 모르는 누군가의 묻고 받았던 도움들이 있었을 건데.

이제는 내가 세상에 너무 찌든 채로 살고 있는 걸까...



며칠 후. 이야기를 듣던 회사 동료가 한마디 한다.


"야 그건 네가 애를 안 키워봐서 그래

그분은 진짜 아빠의 마음이었을 거야. 내 자식이 어디서 저런 상황이었을까 봐

본능적으로 그냥 도와주고 싶었을 거야. 우선 너도 결혼부터 해라"


감동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나의 미혼으로 끝난 이야기.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자식과의 끈끈함의 본능이었을까 아니면 각박한 세상에

때를 묻고 사는 나의 무정함이었을까. 다시 똑같은 상황이라면 이제는 나는

기꺼이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


오늘 밤. 마음 한구석이 많이 시큰하다.

오해해서 미안했다 꼬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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