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회사원의 이야기 - 15. 세상과 직장은 민주적이지 않다.
어느 봄날
"이제 우리 모두 새롭게 한 팀이 되었습니다. 아니지 우리는 이제 한 가족입니다.
새로운 미래를 향해 힘차게 앞으로 나아갑시다. 축하합시다."
와아~~ 박수~~
뒤숭숭하던 소문이 괴담처럼 번질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거라고 예상은 했었다.
허나 그게 어디서부터 어떻게 어디까지인지 몰랐을 뿐.
"적재적소"
논리와 원칙을 가지고 거기에 개인의 적성과 전공, 능력을 고려하여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맞춤 인사 프로세스를 우리 회사는 지향합니다.
십여 년 전 어느 날
올해는 신기하네. 저기 이봐 신입들.
네 과장님.
다들 모두 1 지망이 우리 부서였어?
...
곤란한 질문인가. 그랬다면 미안! 그런데 올해는 입사한 신입사원들 중
김 씨, 이 씨나 박 씨는 없었어? 왜 죄다 다들 성들이 오 씨, 최 씨, 하 씨야?
...
4주간의 공장 연수를 받고 올라와서 받은 부서 배치.
우연찮게(?)도 같은 사무실로 배정받은 동기들은 성씨가 같거나 비슷했다.
김 씨만 모아져 있는 팀. 남 씨와 박 씨가 모아져 있는 팀.
그게 "가나다순"으로 배치되었다는 걸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전공도 성적도 성별도 개인의 우선순위 지망도 모두 다 부질없다는 걸
그저 하나의 부속품이라는 걸 그때 빨리 깨달았어야 했다.
미리 정해진 나사산에 박혀야 할 나사처럼,
뒤통수가 일자 드라이버로 쪼여지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회사에 적응을 해 나갔다. 어찌 됐건 내가 박히고 싶었던 자리가 아니더라도
그 구멍을 메꿔야 하는 사람으로 선택되었음을
감사해하면서 십수 년을 살아왔다.
십여 년 후
허 대리 언제까지 업무만 할 거야? 영어는 물론 잘해야 하고 이제는 코딩 AI 이런 것도 해야지.
업무만 해서는 안 되는 세상이야. 회의 때 보니 영어 실력도 별로던데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또 그 소리 열심히 하면 머 해 성과를 내야지.
에이 이거나 작성해 와
매년 작성해야 하는 개인개발계획
"앞으로의 하고 싶은 계획이나 업무는 무엇인가요?
"현재의 업무와 다르게 어떤 부분을 발전시키고 싶나요?
팀 간 부문 간 도전이 필요하다 생각되면 개별적으로 리더와 긍정적으로 논의를 하시기 바랍니다.
민주적이면서도 합리적으로 개인의 성장을 위해 채찍질하나 보다.
감사하게 생각하고 열심히 해야지.
"머야 영원할 줄 알았어? 이런 일 흔한 거야. 회사생활 하다 보면
이리도 가고 저리도 가고 가라면 가는 거지 다 그런 거야."
그렇게 내가 몸 담고 있던 조직은 없어져 버렸고
박혀서 빠지지 않을 것 같던 나사는 그렇게 영문도 모른 채로 강제로 풀려버렸다.
기름칠해야 된 데서 기름칠도 하고, 꽃단장하라고 해서 페인트도 발라보고, 느슨해지지 않기 위해 조이고 또 조여지고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고 있었을 뿐인데...
자신도 모르게 풀리고 어디 바닥에 버려졌다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남은 사람도, 떠나야 되는 사람도,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도
슬프고 애석하고 자존감을 잃어버린 느낌..
그저 민주적이라고 "개인"을 존중해 준다고 하는 그런 말을 믿었던 걸까?
남을 사람, 떠날 사람 모두 모여 그렇게 서로 술 한잔을 건넸다,
새벽 늦은 시간.
어제까지는 "우리" 였지만, 자정을 기준으로 "남"으로 바뀐 단체 톡방
누군가가 툭하고 "걱정 말아요 그대"란 노래 가사를 뛰웠다.
"에이 과장님 취하셨나 보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다들 내일 뵐게요. 오늘도 역시 즐거웠습니다."
란 반응이 응당 나와야 하지만..
오늘은 메시지를 확인한 숫자는 점점 줄어가지만 누구 하나 댓글을 하지 못한다.
시계는 11시 59분에서 12시로 단 1분이 지났지만 것이 많은 것이 바뀐 하루.
준비 없이 맞은 이별과 이동이 매섭고 아프고 시린 걸까..
한 사람이 떠날 때도 힘든데 서로 한꺼번에 떠나고 나니 마음이 아리다.
또 새롭게 적응해야 하는 게 쉽진 않아 보인다
또 변화된 세상에 순응하며 다시금 쪼여져야 하는 나사들이다.
풀렸다 감겼다 다시 풀렸다 감겼다~
언젠가는 나사산에 박히지 못할 만큼 뭉뚝하게 되면 버려질 거라 예상하면서 살아가는 싸구려 볼트들.
들어올 때만 해도 엄청나게 복잡하게 설계된 시계의 작은 톱니바퀴 중 하나라고 자부하며
내가 없으면 돌아가지 않을 회사라고 생각하며 다녔지만..
적어도 그런 태엽이 아닌 쓰고 풀리고 나면 버려지는 나사라는 걸 깨닫는다.
아니 망치로 뚜들겨 맞고 버티다, 필요 없으면 장도리로 뽑아져 버리는 못이었을지도..
인생은 민주적이지 않다. 주어진 기회도 재화도 어느 하나 공평하게 주어져 있는 시작은 없다.
그저 그때의 나는 최선을 다해 살아가기 위한 삶을 지내고 있을 뿐이다.
다만 오늘도 열심히 보다는 어디에 주어지든 빛을 나타내야 하는 성과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래도
나는
그저 쓰고 버려지는 나사이겠지만 그런 나사조차 하나하나가 풀려가다 보면 세상은
엉망이 될 거라는, 그러므로 내가 또 무언가를 지탱하고 있다는 마음으로 하루를 버텨내 본다.
어디선가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내는 모든 사람들에게 "오늘 하루 수고하셨습니다"
이 작은 페이지를 통해 남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