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너: 완전한 우리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생각하지. 생각을 내뱉어. 글이든 말이든 나의 언어로. 우리는 같은 말, 같은 글로 소통하는 것 같지만 각자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도 몰라. 각자의 언어와 각자의 의미에 갖혀서 그런줄도 모르고 대화라는 걸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나는 좀 더 세밀하고 세심하게 나와 너의 간극을 의심해야 해. 동일한 언어로 자주 퉁쳐지는 너와 나의 다른 생각이 모서리를 잃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대화에 다다를 거야. 그리고 확장된 사고에 기뻐하며 양 손을 머리 위로 들고 엉덩이를 흔들게 되겠지. 몹시 우스워보일지 몰라도 그건 진정한 행복일거야. 뭉뚱그렸던 내가 선명해지는 순간이기도 하니까.
그래, 그건 밖에서 나를 바라보는 신묘한 기분일지도 모르겠다. 별거 아닌데 신묘함에까지 다다르다니, 대화란 건 정말 신묘하군.
지하철에서 만난 우리는 대학생 때 마냥 히히깔깔 신이 났다.
온전히 서로를 이해한다면 거짓말이다. 늘 그랬듯 우린 각자의 행복과 고단함 속에 있다. 다만 오래도록 서로의 이야기에 뜨겁게 철썩이는 변치않는 가슴 한 구석이 있다. 십여년이 지나도록 그렇게 서로의 앞에 앉아있고 오늘도 그러했음이 우리를 말해준다. 각자의 색은 다를지언정 우리의 결은 마치 쌍둥이의 것 같다.
관계는 신뢰와 애정에서 비롯해 그것들로 유지된다. 상대에 대한 애정 없이는 진심을 전하고 싶은 욕구가 생겨날 수 없고, 결국 진심을 전하는 일은 상대가 내 진심을 원한다는 믿음으로 가능하다. 애정과 신뢰가 무너진 관계는 이미 허상이다. 그 사이의 어떤 것에서도 의미를 찾기란 어렵다. 서로의 애정과 신뢰로 가득 차 있는 관계에 온 마음과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잊지말아야 할, 살아있는 관계가 여전히 많다.
언어의 한계, 뛰어넘을 방법이 없다면 깊이와 폭을 넓힐밖에다.
공감과 이해란 능력이 인간이기에 갖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자질이라 쉬이 말하기 어려운 이유는, 의지와 애정에 따라 개인마다 그 정도가 아주 또 몹시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나보다 먼저 고개를 숙이고 손을 내미는 반면, 누군가는 한참 후에도 미동도 없이 제 일에만 집중한다. 그 이의 마음이란 내가 알 방도가 없지만 조금이라도 나와 같기를 바랄뿐이다. 우리가 같은 마음으로 같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나와 너의 경계는 부정의 표현에서 명확해진다. 긍정과 동의로 뭉개져있던 경계는 '아니'라는 말과 태도로 순식간에 도드라진다. 그것으로 우리라 불리웠던 애정과 온기가 식기엔 이르다. 귀기울여 아니라 내뱉은 이의 마음을 의식을 태도를 헤아리고 인정한다면, 무조건적인 긍정보다 훨씬 묵직한 배려이자 상대의 주체성에 대한 깊은 존중일 것이다.
아이에게 '아니야'를 일찍부터 가르치고 듣고자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대화의 말미는 또 하나의 첫머리가 된다. 생각은 지속적으로 증폭되고 이어지고 나는 그림을 그리고, 밤잠을 설친다. 내가 지닌 지도 위에 초라할지라도 분명하게 새 정류장을 그린다. 종착역은 늘 그렇게 새로 쓰인다. 영원도 당연도 없는 밤이 오늘도 너를 따라 나를 다녀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