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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늘의 끝 Oct 24. 2022

프롤로그. 나를 헤아리는 사물들

너무 멀리 가는 날엔 쓰고,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날엔 마십니다




와인을 좋아한다. 한낮에도 종종 와인을 마시곤 한다. ‘어디 먼 데 가고 싶은데 그곳이 어딘지 모르는 마음들을 위하여.’ 한국의 술을 빚고 소개하는 '이쁜꽃'의 양조사, 양유미 대표의 이 문장을 읽었을 때, 마치 내 마음 같았다. 15년 전, 술집 벽에서 이 낙서를 본 이후로 양조사인 그녀에게도 이 문구는 마음의 등대가 되었다고 했다. 그녀는 임신 기간 동안 술을 마실 수 없게 되면서, 우린 무엇을 위해 술을 마시는지 스스로에게 오랜 시간 질문했고, 구원, 쾌락과 함께 떠나고 싶은 마음을 달래는 기능을 꼽았다. 나는 그것이 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맛과 액체의 질감 역시 빼놓을 수 없지만 무엇보다 향을 가진 술이 빚는 공간성은 내게 가장 큰 음주의 이유다. 빨리 취하는 무향무취의 술이 아니라, 맛과 향으로 이곳이 아닌 저 먼 어딘가로 나를 데려가는 술, 나는 그런 술을 좋아한다.



가끔 나를 멀리서 보아야 내 놓을 수 있는 말들이 있고, 내 주변 관계를 떼어 놓고 생각해야만 선명하게 드러나는 감정이 있다. 무엇보다 물리적인 피로감이나 정신적인 여유가 없을 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무기력해지거나 반쯤은 화가 나 있다. 지독하리만치 끊임없는 타인으로부터의 호출은 이런 순간의 나를 무너뜨리려 찾아온 순수한 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나는 두 아이의 엄마다). 나를 가까이서 옥죄는 이 순간의 나에게 잠식 당하지 않도록 나는 잠시 이 곳이 아닌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가야 한다. 그제서야 나는 숨통을 트고 어깨와 허리를 돌리며 몸과 정신을 재정비 할 수 있다.


그럴  나는 냉장고에서 막아 두었던 와인을 꺼내 잔에 따른다. 졸졸졸 흐르는 소리, 잔을 돌리면  속에서부터 퍼져나와 얼굴 전체를 감싸는 , 한껏 들여 맡고  모금 마실 때의 신선하고 생동감 넘치는 , 그것들에 몰입하다 보면 나는 어느새, 완전히 ‘어느    있다. 곳에서 숨구멍으로 깊게 들여 마신 숨은 와인의 향과 함께  몸에 훌훌 흘러 들어와 지금의 나를  걸음 떨어져서 바라   있게 한다. 그건  옆에 누가 있는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무얼 말하고 있는지 들을  있게 된다는 뜻이다. 때론 돌아와 만난  풍경  우리는 와인의 향과 맛처럼 아름답다. 것이 내가  잔의 낮술을 하는 이유다.




나는 평범하지만 대체로 즐겁게 산다. 작고 소박한 감동과 감탄에 크게 행복해 하는 이유도 있지만 즐거움의 팔할은 밝은 가족덕분일터다. 걱정과 고민이 많은 기질로 태어나  앞에 닥친 당장의,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고민 외에도  날에 대한 우려, 찰나의 비도덕적 행위에 대한 패배감, 드물게 일어날 법한 사건들에 나를 자주 놓아본다. 그것은 나를  오랫동안 힘들게 하기도 하여, 남편은 그런 나를 깨물어(물론 장난이다) 어이가 없어 웃다 현실로 돌아오게 하기도, 한참을 울면 토닥여주기도 한다. 아이들은 다양한 이유로 내게 도움을 요청해 그들을 챙기느라 현실로 호출되기도 하고, 속사포로 쏟아내는 정성스럽고 구슬 같은 이야기로 나를 다시 웃게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내 생각과 마음이 너무 멀리에 있으면 당장 지켜내야 하는 일상과의 괴리에 더없이 괴로워진다. 그럴 땐 종종 쓴다. 왜 이렇게 힘든 마음이 드는지, 아무도 내게 묻지 않았지만 내 마음이 며칠간 내게 물은 그 이유와 답을 찾아 쓴다. 휴대폰 메모에 남기고, 보이는 노트에 적는다. 여유가 되면 노트북으로 옮겨 다듬고, 이후로도 며칠동안 쓴 글을 읽고 다듬으며 시간을 보내면 차차 내 감정과 생각, 마음이 선명해 진다. 그렇게 내 안으로 깊숙이 다녀오면 또 다시 살만해진다. 온 마음과 힘을 눈 앞의 일상에 쏟을 수 있게 된다.




나로부터 너무 멀리 가는 날엔 쓰고,  자신에 너무 달라붙어 여유가 없는 날엔 마신다. 그렇게 쓰고 마시는 날들이 나를 살게 한다. 둘은 다르지만 같다. 내일도 나는 쓰고 마시며 일상과 멀어진 마음 사이에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것이다.  일은 매번  되는 것도 아니고 어느 날은 걱정 없이 웃다가 하루가 가고, 어느 날은 이상하리만큼 울겠지만. 나는  쓰고 마시며  자리로 돌아올 때마다 안도하며 외치겠지. , 이런 것도 사는 ! 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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