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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늘의 끝 Oct 30. 2022

밤이 아닌 낮술

낮술 덕분에




20대부터 일과를 마치고 와인 한 잔 즐기기를 좋아해왔다. 밖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회생활을 위한 가면을 쓰고 고군분투 하다 오면 어느 날은 병으로 마시고 쓰러져 잠들기도 했다. 취한 날은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혀 짧은 소리로 그간의 못 내비친 마음을 전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함께 살던 여동생이 "오빠, 언니 취했어요" 하고 전화를 대신 끊어주곤 했다. 취한 내 전화를 종종 받던 남자친구는 지금 어엿한 남편으로 내 옆자리를 지키며 살고 있다. 게다가 서른 중반이 된 나는 전업주부이자 두 아이 양육으로 분주한 매일을 보내는 엄마가 되었다.



그 시절 밤에 취할만큼 즐기던 술은 이제 먼 이야기가 됐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밤시간의 여유는 점점 쉽지 않아졌다. 나의 저녁 일상을 떠올리면 오후 5시 반부터 자아가 분열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밥하면서 소리를 쳤다 다정한 목소리로 칭찬과 위로를 했다, 저녁식사 늘어지면 활기차게 응원을 하다 낮은 톤으로 협박도 하다, 설거지하며 애들 놀이에 어깨춤으로 반응도 하다 싸우면 고무장갑 벗고 가서 무슨일이지? 묻고 우는 애도 달래고 서러운 애도 달랜다. 그렇게 너댓번 고무장갑 벗다보면 나도 울고 싶어진다. 땀 닦으며 설거지를 마치면 10분 정도 잠깐 식탁 의자에 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아이들 씻기기를 시작한다. '할뚜이떠'라며 엉성한 말투지만 벌써 단호하게 제 주장을 하는 작은 아이를 씻기며 '나는 보살이다'를 50번 정도 읇는다. 몸이 제법 커진 첫째가 제 스스로 씻는 것을 도와주면서는 거실에 몇 번을 출동하는지 모른다. 세상 상냥한 목소리 장착하고 '우리주안이 뭐해요?'를 외치면서 말이다. 엄마! 엄마! 엄마! 외치는 아이들에게 엄마 씻는 중이니 잠시 후에 도와주겠다 습해진 화장실 공중에 대고 외치다 결국은 싸움 중재하러 종종 나체로도 나간다. 그렇게 나까지 후다닥 씻고 나면 그제야 한 시름 놓는다. 나 씻는 사이 두 남매 골라둔 책들을 다채로운 자아 끌어내어 읽고나면 드디어 굿나잇, 잘자요, 사랑해요. 정말 드디어! 불을 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육퇴를 앞두고 애들 사이에서 10분 자는척 하다보면 분열된 자아가 하나로 뭉치기도 전에 곯아떨어진다. 그리고 새벽녘 내 자리로 돌아오면 또 자아 되돌리기는 잊고 휴대폰만 하다 이마 몇 대 맞고 잔다. 저녁 서너 시간 사이에 내 안에서 너무 많은 캐릭터를 끌어와야 해서, 캐릭터와 캐릭터 사이에 맥락이란 너무 미약해 나조차도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여 점차 나라는 자아가 희미해지는 기분이 든다. 이게 바로 엄마가 된 나의 저녁이다. 여기에서 어떻게 한밤 한 잔의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



나는 엄마이지만 온전한 나를 놓아 버릴 수가 없다. 아이들과 생활하면서도 여전히 저녁이면 좋아하는 향으로 풍성한 와인 잔에 코를 묻고 나를 위로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긴 마찬가지다. 에너지를 잘 분배해서 쓰지 못하는 탓에 낮 동안 아이들을 챙기고 같이 신나게 놀다보면 저녁엔 지쳐 나를 위한 시간은 커녕, 와인 잔 꺼낼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러다 마신 어느 날의 낮술은 내게 큰 전환이 되어줬다. 신선한 향과 복잡하고 알듯말듯한 맛들로 가득한 그 한 모금 한 모금에 집중하다보니 나는 어느새 어느 먼 곳, 자유의 시간 안에서 온전한 나로 있는 기분이 들었다. 오히려 피곤하고 지친 밤 시간 보다 집중해서 그 한 잔을, 나를 헤아리고 있었다. 내 마음에 묵혀있는 생각과 마음도 솔솔 올라와 조금씩 살펴볼 여유가 생겼다. 그 뒤로 나는 종종 아이들과 갖는 잠깐의 휴식 시간 동안, 설레며 기다린 향을 가진 한 잔을, 오늘에 너무 어울리는 한 잔을, 내 기분을 위로해줄 한 잔을 마신다. 그건 온전한 나를 위한 시간이자, 나에게 몰입하는 시간이다. 나는 엄마이지만 여전히 그런 시간이 몹시 필요한 사람이기에 그렇게 낮술을 마시기로 했다.


가끔은 과거의 날처럼 모든 일과를 마친 , 편안하게 취할 만큼 마시고 싶기도 하다. 그치만 해야할 일들을 앞두고 반짝이는  낮에 마시는  한잔의 와인이란 한편으로 엄마이기에 가질  있는 특권이기도 하다. 엄마로 지내며 사라질  같던  자아는 잠과  귀한 아침식사와 어떤 노래와 이야기, 푸르른   풍경과 계절의 냄새 같은 , 그리고 아이들의 반짝이는 눈과 웃음소리를 보고 들으며 즐기는   잔의 낮술로 얼추, 얼기설기 엉켜붙어 다음날의 나를 살게 한다. 내게로 다녀오는  시간이 나를 잃지 않게 한다. 나는 그런  삶이  좋다. 낮술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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