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늘의 끝 Oct 24. 2022

밤을 까는 일과 깊은 대추맛 오렌지




나는 먹기 좀 번거로운 것들을 꽤 좋아한다. 

생선, 게중에도 특히 식감도 풍미도 일품인 가시밭 살점들

나물, 산더미 같던 양이 손질하고 데치고 무치고 나면 한 주먹, 한 입 거리

밤 같은

먹기 위한 수고로움에 비해 입에 들어가는 양이 아쉬운 것들. 누가 만들어 줬는지 참 수고로운 입맛이다.

 

연휴 말미에 이웃언니에게 받은 밤을 손질한다. 불려둔 밤의 겉껍질을 까고 다시 속껍질을 불린다. 기다리는 시간만큼 딱딱하고 두툼한 껍질들이 유연해진다. 속살이 드러나기란 이리도 쉽지 않다. 손 바쁜 일을 하자니 입이 심심하여 잔에 와인을 한 잔 낸다. 냉장고에서 꺼낸 와인은 짙은 주황색 빛이다. 가을에서 겨울로 흐르는 마른 계절, 푹 익은 대추를 닮은 깊고 달큰한 향, 견과류 특유의 기름지고 고소한 맛이 함께 어우러져 진한 단맛을 부드럽게 감싼다.

 

 

추석 전날 아빠는 티비 앞에서 밤을 깠다. 모두가 둘러앉은 끝 쯔음 주방 초입에, 밤이 든 그릇을 앞에 두고 아빠는 우리와 이야기를 두런하며 밤을 깠다. 생밤을 매우 좋아하는 난 아빠 옆에 아주 붙어 앉아 깐 밤을 오도독오도독 깨물어 먹었다. 아빠는 웃으며 밤을 계속 까줬다. 상에 올려야 한다는 소리가 할머니 입 밖으로 나올 때까지 아빠는 밤을 깠고 나는 오래 밤을 먹었다.

 


쉬이 먹었던 많은 것들 뒤에 서성이는 깊은 수고로움을 밤을 까는 지금에서야 한 뼘 더 안다. 밤을 까길 잘했다. 생각 끝에 첫 밤을 깨문다. 와드득





이전 09화 운수 좋은 날과 솔의 눈 오렌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