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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늘의 끝 Oct 26. 2022

운수 좋은 날과 솔의 눈 오렌지




오랜만에 아침 샤워다. 어제 11시가 넘도록 야근하고 집에 들어와 기절했다. 이제 막 머리를 헹구려는데 물이 안 나온다. 아, 눈에 샴푸가. 수건에 손을 닦고 눈도 닦고, 부엌으로 달려가 싱크대 물을 틀어본다. 역시 물은 나오지 않는다. 급한 대로 냉장고 생수로 눈을 씻어낸다. 아… 마음속으로 발을 동동댄다. 한참을 그러고만 있다 한 묶음 사 두었던 생수가 생각났다. 한 손에 생수통을 들고 머리를 헹구는 일은 여간 쉽지 않다. 느린 속도로 대충 거품을 씻어낸다. 혹시나 싶어 물을 틀어보니 그제서 다행이 물이 나온다. 10분도 안걸리는 머리 감기에 30분이 더 들었다.


당연히 회사에 늦었다. 늘 정각에 또각이는 구두 소리를 내며 빠듯하게 도착하는 사수가 눈에 불을 켜고 나를 부른다. 가방을 던지듯 책상에 두고 그녀에게로 갔다. 변명할 마음이 생기지 않아  ‘죄송합니다.’ 하고는 듣고 있는데 흘끗 맞은편을 보니 맨날 지각하는 윤대리가 와 있다. 오늘도 지각을 했는지 아닌지 늦은 나는 알 길이 없지만 입고리 하나 올리며 웃는 걸 보니 그다지 늦진 않은 모양이다.



퇴근 지하철. 옆에 여자가 잠이 들었는지 고개를 꾸벅인다. 내 눈은 휴대폰 액정을 보고 있지만 사회생활 눈칫밥으로 불쑥 튀어나온 눈은 바로 옆 여자의 꾸벅이는 고갯짓을 읽을 만큼 넓어진 화각을 자랑했다. 한참을 영화 리뷰를 빠져서 읽고 있는데 후다닥, 그 여자가 문 앞으로 뛰어나갔다. 문 앞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급하게 문 밖으로 역 이름을 찾는다. 아차 싶은 몸짓, 이 역이 맞는 모양이다. 튀어나가려 몸을 움찔거렸을 땐 이미 문이 반이나 닫히고 있었다. 문 앞에서 비석처럼 서 있던 여자가 뒤돌아 자리로 돌아온다. 물론 내 시선은 여전히 내 손에 들린 휴대폰 액정이지만 앞서 말했듯 내 근방 3미터까지는 어떤 움직임도 읽을 수 있다.

돌아온 그녀는 나를 보고 있다. 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시선이 매우 따갑다. 나를 왜? 뭐지, 왜지? 고개를 그녀에게 돌리자마자 눈앞이 짜르르 울린다. 그녀의 오른 손이 내 왼쪽 뺨을 후려쳤다. 지금 뭐지? 왜? 왜 나를? 어안이 벙벙해져 돌아간 고개를 거두지도 못하고 한참을 그러고 있는데, 예상치 못한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귀를 찌른다. "깨웠어야지! 나 내려야 됐잖아!" 네? 제가요 왜요? 내가 아는 사람인가? 본인이 내릴 곳을 왜 내가 알려줘야 하지? 입 밖으로 이런 질문을 꺼내지도 못한 채 고개와 시선을 거둔다.

어이가 없다. 일진이 꽝이다

왜 안 내리지? 나 내려야 되는데. 내릴 때 내 뒤통수를 치는 건 아니겠지? 왕십리역, 그런 걱정을 하며 급한 발걸음으로 지하철에서 내렸다.



침대에 누웠다. 오늘의 일들이 머릿속에 떠다닌다. 정말 최악이군. 눈을 감았다. 오늘은 또 얼마나 잠을 못 이루려나. ‘빨리 수면유도제를 먹고 자고 싶다’ 라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의식을 잃듯 수면으로 빠져들었다. 몇 년째 나를 괴롭혀 온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던 불면의 밤이 그날은 찾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 까지 나는 깨지 않았다.

정말 운수 좋은 날이 아닐 수 없다.



솔의 눈 맛이 나는 시원한 오렌지 와인. 코르크 마개를 덮었던 송진 향이 오래도록 짙게 풍긴다.한 낮의 와인에 지난 경험과 상상이 뒤섞여 쏟아진다.


나는 가끔 지각을 했고, 지각 이외의 이유로도 상사에게 종종 불려갔으며, 어느 지각 일에는 단수를 핑계 대기도 했었다. 실제로 단수가 되었던 날엔 지각한 이유를 대지 않고 그냥 사수의 말을 흐르게 두고 서 있었다. 지하철에서 아무 이유도 없이 모르는 사람에게 욕을 들을 적도 있다. 물리적 위협이 되는 행동에 소름이 돋도록 겁이 나 다음 역에서 바로 내렸다. 그 이후로 지하철을 타면 자주 두려워졌지만 몇 년이 지나니 또 다시 살만해졌다. 운수가 좋지 않았던 과거의 날들은 시간을 따라 구르고 굴러 둥굴어졌다. 마음과 머리 속에서 데구르르 구르다, 한 해 두 해가 지나고, 어느 날 갑자기 밖으로 쏟아지면 알게 된다. 괜찮아지고 있구나.

수면유도제 따윈 필요 없이 귀가 후 쓰러져 잠이 들었던 날들이 내게 있다. 수면유도제가 있었으면 하며 밤잠을 설친 날들도 있었다. 여전히 나는 일과를 마치면 쓰러져 잠들기도, 밤잠을 기다리며 눈을 감고 양을 세기도 하는 날들을 산다. 간간히 조용한 밤 식탁에 앉아 잠 따윈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쓰고 마시는 날도 끼어있다. 한낮의 술과 쏟아진 이야기를 주워 담아 쓰는 오늘은, 정말 운수가 좋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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