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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늘의 끝 Oct 25. 2022

친구의 주스 병과 오렌지 껍질 맛 와인




아까 가방에 넣은 주스 뚜껑을 내가 잘 닫았던가?


친구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 차창 밖 풍경에 취해있다 번뜩 친구 가방에 넣은 주스 병 생각이 난다. 늘어져있던 허리와 목이 곧추 세워지고, 흐트러졌던 눈동자가 선명해진다. 플라스틱 병과 뚜껑에 난 홈들이 완벽히 들어맞아 더는 놀아갈 틈도 없다는 확신을 내 두 손이 느꼈던가? 그런 의심이 스멀스멀 올라오자 버스기사의 거친 운전에도 멀쩡하던 멀미가 갑작스럽게 시작될 것만 같다.


친구가 아끼는 그 가방에 주스가 홀랑 쏟아졌으면? 아니 조금이라도 질질 새고 나서야 친구가 뒤늦게 그 사실을 안다면? 친구가 이미 찐득해져 버린 가방을 닦을 휴지를 찾으며 맡고 싶지 않은 시큼한 주스 냄새를 맡는 모습을, 그 누래진 가방 한 켠을 보는 표정을 그려본다. 아니다. 친구보다 가방 밖까지 새버린 그 놈의 주스(내가 뚜껑을 제대로 닫지 못한, 아니 않은 그 문제의 주스!) 때문에 지하철 옆자리에 앉은 젊은 여자가 새로 산 꽃무늬 원피스에 묻은 노란 물을 탈탈 털며 불쾌한 눈으로 쏘아보고 있진 않을지. 아니면 저보다 어린 상사의 야단스러운 호통에 삼차까지 달린 아저씨가 육두문자 날릴 기회를 (하필이면)그 놈의 주스가 제공하고 있는 건 아니려나. 누군가의 눈치를 보고, 사과를 하고, 결국엔 지하철을 내리고. 벤치에도 못 앉고 안전선 위에 그저 멍하니 서 있는 친구의 눈은 어떨까. 가방 안의 주스 뚜껑을 재차 확인해 볼 것을, 내게서 받은 주스를 그때 직접 닫을 것을, 주스를 사지 말 것을, 애초에 목 마른 것조차 모를 것을, 혹시나 저 자신에게 그런 질문들을 하게 될까봐.



그런 생각에 휩싸이자 내 팔 등의 솜털들이 살 갓 위로 바로 선다. 어떤 작은 움직임에도 놀랄 준비가 되어 있는 보초서는 한밤의 이등병처럼. 나는 고개를 휙 젖힌다. 마침 옆 사람이 내리기 위해 내 무릎과 앞 의자 사이 틈을 비집고 나간다. 머리 속에서 돌아가던 영사기가 멈춘 틈을 타 머리 속으로 할 일들의 목록을 세운다. 집에 가서 밀린 빨래 돌릴 생각을 하고 아침에 바삐 나오느라 정리 못한 거울 앞 머리카락도 정리하기로 한다. 아마도 외출 동안 생겼을 설거지도 마저 하고, 그리고 그리고 또 무얼 할까. 괴로운 스릴러 영화를 보다 우연찮게 탈출해 나온 것처럼 그 틈을 타 다른 생각들로 머리 속을 메운다.



버스 안에서 생각했던 집안 일들을 마치자 마자 샤워를 했다. 혹시 상대에게 상처를 준 건 아닐까 걱정이 되는 날, 나는 마치 친구가방 속 주스 병을 걱정하는 사람 같다. '잘 도착! 오늘 즐거웠음!' 감은 머리를 수건으로 둘둘 만 채로, 그 문자를 확인하고 나는 한 숨을 놓는다. 마음이 놓이니 그제야 목이 마른다. 갓 따른 오렌지 와인이 탁하다. 며칠 째 야금야금 마셔서 그간 가라앉았던 침전물이 이 마지막 잔에 그대로 남았다. 덕분에 효모향과 오렌지나 자몽 껍찔 맛이 도드라지게 느껴진다. 불편했던 감정들이 다소 가라앉자 그 외에 남은 맛은 그저 시냇물 같다. 아무런 맛 없이 쿰쿰하고 씁쓸할 뿐이다.


내가 걱정했던 건 친구일까 나일까 그 오렌지 주스 병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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