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 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오늘 여러분과 이야기하고 싶은 책은 줄리언 반스의 <The Sense of an Ending>,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입니다. 2011년도에 출간되어 그 해 바로 스웨덴의 노벨상, 프랑스의 콩쿠르상과 더불어 세계 3대 문학상으로 알려진 맨부커상을 수상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바로 그 다음 해인 2012년에 번역되었고 2017년에는 영화로도 각색되어 개봉했죠.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회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기억나지도 않는 20대 때 내뱉었던 말 한마디가 무려 40년이 지나 60대가 된 나에게 돌아와 당시 나의 말 한 마디가, 글 한 글자의 선택이 어떻게 타인의 삶에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그 선택과 결과에 대해 내가 그 어떤 속죄도, 책임도 질 수 없는 상황에서 오는 무력감, 그리고 그 안에서 오는 허망함과 회한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타 소설과는 달리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 연이어 등장하는 반전과 반전은 놀라움보다는 안타까움과 슬픔을 자아냅니다.
나아가 이 작품을 읽고 나면, 현재 우리가 만나는 그리고 만났던 모든 사람들, 그들과 나누는 대화, 시간, 그리고 기억에 대해 혹시 내가 말했던 무언가로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누군가에는 돌이킬 수 없는 삶의 방향을 선택하게 되지 않았나, 하는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제가 개인적으로 인생 소설로 꼽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저자, 줄리안 반스는 1946년생이고 영국에서 태어났습니다. 옥스퍼드에서 현대 언어를 공부한 후 편집자, 평론가로 일하다가 1980년에 첫 장편소설 <메트로랜드>로 서머식몸 상을 받으며 이 후 유럽 대부분의 문학상을 석권할 정도로 현재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입니다.
이 소설의 흥미로운 부분은 제목에 있습니다. 원제는 <the sense of an ending>인데 한국어판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로 출간되었죠. 이 제목은 사실 소설 제목과도, 그리고 내용과도 뜻이 완벽하게 반대되는 제목이라 한동안 우리나라 독자들로부터 논란이 있었습니다.
the sense of an ending이라는 뜻이 '마지막이라는 느낌, 무언가 이제 끝이 나버린, 사라진, 없어져버린 느낌, - 조금 더 의역을 하자면 혹은 마지막에 가서야, 끝에 가서야 알게 되는 느낌, 찾아오는 느낌 이런 것인데 한국어판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로 제목을 지었죠. 그리고 원작의 내용과는 반대되는 제목이죠 왜냐하면 실제로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예감한 모든 것들이 다 틀렸으니까요.
이에 대해서 일부에서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 숲>이 <해변의 카프카>로 제목이 바뀌어 출간된 것처럼 자체적인 해석이 들어간 거라 괜찮다고 생각하는 의견이 있는 가 하면, 일부에서는 작가의 뜻을 왜곡했다는 점에서 잘못된 제목이라고 말합니다.
개인적으로 영문 제목을 정확하게 번역하라면 만시지탄이라는 말이 어울릴 것 같아요. 하지만 저는 한글판 제목도 좋아합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라는 소설 내용과 정반대의 것을 이야기하면서 오히려 우리가 살면서 예상하고 예감하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얼마나 시간으로 인한 기억 왜곡인지를 반어법적으로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해서, 저는 좋아합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반전에 반전이 있는 내용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그 반전이 중요하지 않는 독특한 구조를 띄고 있습니다. 그 구조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이 소설의 줄거리와 그 반전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배경은 60년대 영국. 고등학생인 주인공 토니와 그 친구들에게 어느 날 전학생 에이드리언이 합류해 삼총사에서 사총사가 됩니다. 허세 가득하고 실없는 농담만 하는 또래들과 달리 에이드리언은 남다른 분위기와 총명하고 지적이어서 또래 친구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고 학교와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촉망받는 학생 대접을 받습니다. 토니는 그런 에이드리언을 무척 동경하고 부러워하죠. 대학 진학후 토니는 베로니카를 사귀게 되고, 어느 날 그녀의 집을 방문해 가족들을 만나면서 기묘한 분위기를 느낍니다. 베로니카의 어머니로부터 "그녀에게 너무 많은 걸 내주지마"라는 충고를 듣게 되죠. 이 후 이 토니는 베로니카와 헤어지게 되고, 어느 날 베로니카와 사귀게 되었다는 에이드리언의 편지를 받습니다. 허락과 이해를 구하는 에이드리언의 편지에 토니는 두 사람의 관계를 용인한다는 답장을 보내고 어느 날, 에이드리언의 자살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40년 후, 토니는 60대가 되었습니다. 결혼을 했고 아이가 하나 있지만 이혼한지 오래죠. 그런데 어느 날, 유언장이 하나 도착합니다. 바로 베로니카의 어머니인 사라의 유언장. 베로니카의 어머니는 토니 앞에 500파운드를 남기고 (현재 한화 약 80만원)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유품으로 남겼다는 내용. 에이드리언은 40년 전 일을 떠올리며 몇 달 만나고 헤어졌던 베로니카와 잠깐 이야기한 게 전부의 그녀의 어머니가 왜 그에게 40년이 지난 지금 유언장을 보냈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궁금증이 생긴 그는 현재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을 베로니카가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녀를 어렵게 만나게 되죠. 토니의 계속되는 요청에 베로니카는 어느 날 에이드리언의 일기장 단 한쪽만을 찢어 주었는데, 그 안에는 수학 방정식처럼 보이지만 수학 방정식이 아닌 요상한 기호들과 "그래서 예를 들면, 만약 그 때 토니가."라는 문장으로 마무리되는 일기장의 한 페이지만을 받게 됩니다. 이후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아무것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소리를 화난 베로니카에게 듣고 무언가 자신이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베로니카로부터 40년전 자신이 에이드리언에게 썼던 편지를 받게 되죠.
그 편지를 읽는 순간 토니는 충격에 빠집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쓴게 분명한 그 편지에는 자신이 40년 전 교제를 허락해달라는 에이드리언의 편지에 사실은 자신의 기억처럼 상냥한 답장을 보낸 게 아니라 온갖 저주를 퍼붓는 편지였거든요. 그 편지 안에는 너와 베로니카가 자폐아를 낳았으면 좋겠다는 저주와 함께, 베로니카와 잘 사귀고 싶으면 베로니카의 어머니를 한번 만나봐라, 그 어머니가 자신의 딸을 조심하라고 하던데, 너도 한번 찾아보고 조언을 구해보는 게 어떠냐 라는 긴 글 썼던 것을 기억해 냅니다. 이후 이후 토니는 우연히 베로니카와 함께 있었던 한 자폐아 청년을 보고 그 순간, 아주 당연하게도 그 자폐아 청년이 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의 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확신을 가지고 그 자폐아 청년이 사실은 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의 아이가 아니라, 그런 토니의 편지를 받고 그의 말처럼 베로니카의 어머니인 사라를 찾아가 그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반전이 중요하지 않은 줄거리란 무엇인지, 먼저 이를 뒷받침해주는 구조를 살펴보고 그 다음 줄거리를 함께 알아보도록 해요.
먼저 이 소설은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요.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토니 웹스터의 1인칭 시점으로 쓰여져 있고,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1부는 20대 초반까지의 어린 시절 이야기, 2부는 60대인 현재의 이야기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점이 이 1부와 2부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누어진 게 아니라는 점이에요.
1부는 60대인 토니가 기억하는 20대 때의 과거이고,
2부는 60대인 토니가 1부에서 기억한 자신의 20대 때였던 과거를 다시 한번 떠올리면서 그때 그 일이 대체 무슨 의미였을까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현재입니다.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점도 이 소설의 특징인데, 모든 걸 꿰뚫어보는 전지적 작가 시점이 아니라 독자가 소설 속 등장 인물 중 단 한명만의 이야기를 듣고 정보를 얻는다는 점이 이 소설에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1인칭 화자가 등장했을 경우 일반적으로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경우를 말합니다) 독자들은 그 인물이 말하는 일들이 모두 사실일거라고 받아들이게 되는데, - 그러니까 적어도 그 일들에 대해 말하는 화자에게 직접 일어난 일들이라고 여기게 되는데 - 여기서는 등장 인물 본인조차도 자신의 왜곡된 기억을 계속해서 복기한다는 점, 그리고 그 후에 소설에 나오는 두 번의 반전을 통해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를 하는 주인공 토니에 대한 신뢰가 독자 입장에서 깨지게 된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스토리텔링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을 때의 기분을 지금도 또렷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몰라서 그랬다, 그런 뜻으로 한 게 아니었다 - 라는 말 한마디로 돌이킬 수 없고 물러설 수 없는 내가 일으킨 어떤 일들, 그 파장들. 그리고 그 결과물을 40년이나 지나서야 마주하게 된 토니의 망연자실함과 그 안에서 오는 무력감과 회한이라는 감정에 저 역시 이입이 되어 허망했던 기억이 납니다. 왜냐하면 저 역시, 떠오르는 일들이 있었거든요. 과거 누군가 저에게 했던 말 하나가, 그리고 글 한줄이 몇 년이 지나도록 저를 괴롭혔던 일들이. 그리고 그와 더불어 제 자신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지만 혹여나 저 역시 저의 말 한마디로, 그리고 글 하나로 누군가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슬프고, 두렵고 또 한편으로는 무서웠습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토니가 과연 이런 일들에 대해 책임을 저야 하느게 맞느냐. 이렇게 슬퍼하고 무력감을 느끼며 회한이라는 감정에 대해 계속해서 언급하는게 합당한 일이냐. 이건 아마도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낄거라 생각합니다. 이 비극에 책임이 있다, 책임이 없다. 저는, 약간의 책임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분명 그 날 토니가 그런 편지를 쓰지 않았다면, 베로니카의 어머니를 한번 찾아가보라는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 에이드리언은 분명 찾아가지 않았을테니까요. 그리고 토니 스스로도 계속해서 말하죠. "나는 책임의 사슬을 보았다"라고요.
저를 더 슬프고, 두렵고 무섭게 만든 부분은 사실 이 부분이었습니다. 그렇게 순간 자신의 감정에 욱해서 내뱉었던 토니라는 인물이 사실은 너무나도 평범한 인물이었던 것. 책에서도 계속 강조하잖아요 본인은 평범하고, 소심하고, 불화를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라고. 갈등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어하는 성격이라고. 그날 그 편지도 결국 그냥 술에 취해서 썼기 때문에 기억도 못하고 있었다고. 자신은 정말 그 둘이 잘못되기를 바란게 아니었다고. 그러면서 자책하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예전에 이언 맥큐언의 <속죄>라는 소설에서 이동진 평론가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악인과 악인이 아닌 사람을 나눌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다양한 모습이 있고, 상황이라는 것이 존재해서 살인같은 법에 저촉되는 경우가 아니라면 이처럼 이분법적으로 사람을 나누는게 가능한가, 그 기준을 어떻게 둘 수 있을까. 여기서 이동진 평론가는 악인과 악인이 아닌 사람을 나누는 기준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데, 그 기준은 바로 죄책감의 유무라고. 그리고 그 죄책감으로 인한 속죄라고. 소설 <속죄>에 등장하는 브리오니는 "타인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죠. 하지만 그것을 돌이킬 수는 없더라도 이 후 이 사람은 죄책감으로 몸부림쳤고 그것을 속죄하게 위해 노력했다는 겁니다. 사실 모든 사람이 크건 작건 잘못을 저지르잖아요. 그것을 인식하고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바라보려 하는가, 죄책감을 갖고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잘못된 행위의 파장을 바로 잡으려고 노력하는가, 그것이 악인과 악인이 아닌 사람을 가르는 가장 결정적인 기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라고.
토니의 회한이 슬픈 이유는 이겁니다. 죄책감을 느끼고 속죄를 하고 싶은데, 방법이 없어요.
만약 토니가 봤던 자폐아 남자가 본인의 첫 추측대로 베로니카와 에이드리언의 자식이 맞았다면 속죄를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베로니카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겠죠. 그런데 그 아이는 베로니카의 아이가 아니고 베로니카의 어머니와 에이드리언의 아이입니다. 그리고 그 둘은 이미 죽어서 세상에 없죠. 속죄를 하고 싶어도 그 대상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말과 행동과 시간들. 무력감과 회한.
한 사람의 말과 글이 가지고 오는 파장력에 대해 보여주는 이 소설은 결국 인간이 가지고 있는 회한이라는 무력감과후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회환은 인간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유한한 시간과 그로 인해 왜곡되는 기억으로 만들어지죠
소설 속에서 회한이라는 remorse라는 말의 어원이 '한번 더 깨문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와서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다는 무능의 감각때문에 회한의 감정이 끔찍한 것이거든요. 죄책감과는 다르죠. 죄책감에는 자기가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요. 사죄를 하거나 용서를 구하거나 잘못을 고치는 노력을 하거나.
소설 초반부 부터, 이처럼 시간과 기억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게 이 소설 전체의 복선과 밑그림을 제공합니다. 바로 고등학교 역사 수업 시간에 역사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란 교사의 질문에 토니와, 에이드리언의 대답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먼저 토니는, 역사가 무엇이냐, 라는 교사의 질문에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교사는 "그래 안그래도 자네가 그렇게 말할까봐 걱정을 좀 했는데. 그게 또한 패배자들의 자기기만이기도 하다는 것 기억하고 있나?"라고 말합니다.
반면
에이드리언은,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입니다. 그리고 모든 역사적인 사건에 대해 우리가 진실되게 할 수 있는 말은 '뭔가 일어났다'는 것뿐입니다." '그냥 일어날 뿐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혼란이죠"
60대의 토니.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 아니다. 이제 나는 알고 있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는 것을.
그리고 소설은, 고등학교 수업 시간에 역사란 무엇이냐라는 교사의 질문에 토니도, 애이드리언도 아닌 기억나지도 않는 어떤 학생의 대답, 혼란이라는 말로 끝을 맺죠.
"거기엔 축적이 있다.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너머에, 혼란이 있다. 거대한 혼란이."
다시 말해 삶 자체가 거대한 혼란이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 쓰라렸던 이유는
우리는 어떤 일이 일어나면,
특히 내가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이기 힘든 어떤 일이 일어나면
그 원인을, 이유를 알고 싶어하는 것 같아요.
문제를 해결하고 싶고, 상처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죠.
근데 이 소설에서 회한이라는 감정이 지배적인 이유는
어떤 사건의 원인을, 이유를,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호하죠. 애매하고.
소설 끝까지 애이드리언이 왜 자살을 했는지는 추측으로만 가능하고
베로니카의 어머니는 왜 40년이 넘게 만나지 않은 토니에게 500파운드와 에이드리언의 일기장으르 남겼는지,
그 일기장에는 무엇이 있었는지,
40년동안 베로니카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모두 다 모호하고 추측으로만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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