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1일1생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인 Mar 16. 2023

1. 러닝

그러나 내가 화가 난 이유는 다른데 있었다.

달리기는 "싸구려 운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내가 화가 난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니었다. 그 말이 질투에서 비롯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그녀가 한다는 그 "비싼 운동"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불만과 자꾸만 묻는 "러닝 남자들"에 대한 궁금증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이런 타입은 익숙하다. 나를 건드릴 수 없다. 내가 화가 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나는 그날 그녀를 보면서 나의 가능성을 보았다.

그래서 화가 났다.



사람은 목표를 이루지 못해서만 좌절하는 게 아니다. 목표를 이루어도 좌절할 수 있다.


그 목표가 만약 본인이 바라던 세상을 조금도 만들어주지 않았다면. 그 목표만 이루고 나면 일어날 것이라 믿었던 그 수많은 도파민 넘치는 상상들이 단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사람은 무너질 수 있다. 꼬일 수 있다. 쓰러질 수 있다. 화날 수 있다. 그래서 모두가 기피하는 불쾌한 인간. 꼬인 인간. 화난 인간. 부정적인 인간.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버린다. 그날 그녀를 보면서 나 역시 그녀처럼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화가 났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볼까.



그녀는 얼마 전에 바프를 찍었다. 목표로 했던 일평생 몸매를 만들었지만 촬영은 엉망이었고 그걸로 그냥 끝이었다. 그녀가 펼쳐질 것이라 예상했던 일들은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다. 일도, 우정도, 남자도.



평생 통통도 아닌 퉁퉁한 몸매의 소유자였고, 몇 달간의 극단적 운동과 치열한 식단 관리로 최고의 몸매를 만들었지만 그녀의 촬영은 (그녀의 말로 표현하자면) "개판"이었고 탄탄한 그녀의 몸매에 비해 그녀의 주름만 더 깊어졌다. 피부결은 더 안 좋아졌고 비틀어진 치아는 더 도드라졌다. 그런 모습은 "비싼 운동"을 한다는 그녀의 말들과 자꾸만 어긋나 나에게 혼란을 줬다. 내가 아는 부자들은 명품 옷이나 가방을 들고 다니진 않아도 늘 반듯한 자세로 걷고 단정한 옷을 입었다. 모두 바른 치아와 고운 피부를 지녔다. 그녀는 포크도, 나이프도, 앉은 자세도 먹는 모습도 삼키는 모습도... 정말 돈 많은 집안 출신이 맞나? 영국을 한번이라도 가본 적은 있는 건지, 그 호텔에서 정말 식사를 해본 적이 있는건지, 머랭과 클로티드 크림은 한 입이라도 먹어보고 저런 소리를 하는 건지, 기본적인 시세와 공급과 수요는 알고 저런 단어를 쓰는건지 자꾸만 의구심이 들었다. 그녀가 남자친구가 없으면서 외국에 남자친구가 있다고 인스타에 적은 걸 본 적이 있다. 처음에는 내가 그녀를 안지 얼마 안되었기 때문에 남자친구가 있는지 몰랐던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나도 촬영한다고 내 최고의 몸매를 만들어 놓고, 그녀처럼 되면 어쩌지.

불가능하리라 여겼던 목표를 이루고도 원하던 세상이 펼쳐지지 않아 꼬인 인간이 되어버리면 어쩌지.



화가 났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나 역시도 그렇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런 나의 가능성에.

매거진의 이전글 5. 기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