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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인 Apr 22. 2023

48. 자살

이 고통이 영원할 것 같을 때 사람은 자살한다

자살은 원래 봄과 가을에 많이 일어난다.

외롭고 슬프고 추운 겨울이 아니고 덥고 끈적거리는 여름도 아니라.



자살은 슬프다.

모르는 사람의 죽음도 그렇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고등학교 후배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졸업하고 처음으로 학교에 갔다. 혼자 한밤중에 운동장에 서서 그 아이의 명복을 빌어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장소를 들었을 때 펑펑 울기도 했다. 그 곳은 대낮에도 아무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풀과 나무만 가득한 곳이었다. 나도 고등학교 때 그 공원에 혼자 간 적이 있다. 그래서 안다. 내가 여기 왔다는 걸 아무도 모르고 이유 모를테고 라져그 누구도 슬퍼하거나 미안해 할 사람 없을 거라는 것도.



어릴 때부터 혼자인게 익숙했다. 하지만 아무도 나를 듣지 않고 나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현실에는 적응하기 어려웠다. 관심이, 애정이, 사랑이, 포옹과 스킨십이 매우 고픈 아이였다. 그래도 나는 자살하지 않았다. 대신 기필코 복수하겠다고 다짐하고 그 자리를 나와 독서실에 갔다. 그냥 억울했다. 이대로 죽기에는 억울해, 이것뿐이었다. 누구 좋으라고 내가 죽냐. 다른 건 몰라도 죽는 것 만큼은 내가 원할 때 내가 죽겠다. 자살을 해도 내가 하고 싶을 때 하겠다, 이것뿐이었다. 그냥, 그냥 -  그냥 다른 사람들이 자꾸 죽으라니까 죽 싶다가도 죽을수가 없었다. 사람들 소원을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내가 죽으면 그 사람들은 아이구야 좋다 하면서 살텐데 그런 기쁨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 결심했다. 머리는 자신 있었으니까, 꼭 반드시 사회적으로 성공해서 아주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너희들을 다 죽여주마 - 하고. 지금 생각하면 치기 어린 우스운 소리로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그땐 그랬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계속 치이기만 하고, 혼자 참고 버티다가 겨우 도움을 요청했을 때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모르겠다. 왜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까. 왜 도와달라는 나의 요청을 다들 무시했을까. 내가 공부를 잘해서? 시간이 많이 지나고 내가 물었을 때 내가 들은 대답은 그거였다. 넌 늘 혼자 잘했으니까. 공부를 잘했으니까.  ...개소리. 핑계. 비겁한 겁쟁이들. 미안하다는 소리는 들은 적 없다. 모든 잘못은 나에게 있던가 나의 우등생 생활에 있던가 그도 아니면 내 기억이 잘못되었다는 말뿐이었다.



처음에는 이 모든 게 내 외모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생각을 굉장히 오래했다. 당시 집에는 돈도 많았고 아버지는 학벌도 좋은데다 직업도 남들이 부러워했기 때문에 그런 걸로 여기저기 힘든 일을 겪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분명 티가 나기 마련이다. 외모때문이 아닐까 하는 내 예상은 반드시 내가 연예인처럼 예쁘지 않아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분명, 나를 건드려도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느꼈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났던 것이다. 아무에게도 아무 짓도 안했는데 왜 나에게만 자꾸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왕따 당하는 애를 도와줬다가 되려 그 왕따 당하는 애까지 합세해서 나를 왕따한 적도 있다. 이해가 안 갔다. 나는 아무도 괴롭히지 않았다. 공격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 왜 전학가는 학교마다 이런 일이 반복되는거지?



그러다가 어느 날, 돈 많고 잘 살고 공부 잘하는 애들이 다니는 학교에서도 이 일이 반복되는 순간, 그때 알았다. 만만해서. 내가 만만했던 것이다. 아무리 공부를 잘하고 집에 돈이 많고 아버지 직업이 좋아도 상관없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게 있다. 동물은 무조건 무리에서 약자를 만들어 조직의 협력을 일구어낸다. 내가 괴롭힘을 당했던 이유는 만만해서였다. 내가 만만하게 보이고, 만만하게 느껴져서. 그리고 당시 그들의 느낌은 틀리지 않았다. 집도 학교도 갈 곳이 없었으니까.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나에게 오늘 하루가 어땠냐고 묻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늘 맞고 다니면서 너는 못 생겼다, 너같은 애를 누가 좋아하냐, 널 좋아하는 남자는 없을 것이다, 네가 그러니까 친구가 없는 것이다 너는 맞을 짓을 하고 다닌다 - 라는 소리를 듣고 다녔다. 울면서 공부하고, 화내면서 공부했다. 할 수 있는 게 공부밖에 없어서 공부만 했다. 다 죽이고 싶었다. 나도 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죽지 않았다. 대신 비틀려진 화로 가득 찼다. 부글부글. 부글부글. 아주 어릴 때부터, 10대와 20대까지 내내. 나도 싫고 남도 싫고 세상은 더 싫고. 다 죽이고 싶어서 내 탓 남탓 하면서 미친듯이 공부만 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렇게 활활 타오르는 분노로 나는 결국 원하던 직업도 돈도 남자도 다 얻었다가 - 결국 스스로의 불에 그대로 데여서 몸도 마음도 정신도 쓰러진 채 귀국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늘 죽고 죽이고 싶어하는데 몸과 마음과 정신이 버틸리가 있나.



그리고 지금의 내가 되었다. 러닝을 하게 되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래서 지금은 그때와 같은 분노가 없다. 시사철 달고 다니던 감기를 그 이후 단한번도 걸린 적 없다. 누굴 죽이고 싶지도 않고, 죽고 싶지도 않다. 남 탓도 안하고 내 탓도 안한다. 남욕은 더더욱 안한다. 그저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며 화가 나 그 사실을 그저 인지하고 인정하고 수용하는 사람이 되기를, 혼자 묵묵히 그 화를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감사한 마음을 지니는 사람이 되기를, 나도 타인 용서 가능한 사람이 되기를. 도망치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뛰면서 되뇌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용서하자 용서한다 용서한다 너도 나도 그때 그 모든 시간들도. 면서 음악을 듣지 않는 이유는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뛰면서 그렇게 많이 우는 이유 역시도.



...물론 간혹 과거가 덮쳐올 때가 있다. 명치에서 분노와 억울함과 슬픔이 몰려올 때도 있다. 나 자신이 또다시 가치없는, 쓸모없는 인간이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는 그냥 가만히 있는다. 울고, 울고 울다가 그냥 조용히 가만히 혼자 있으면서 그 과거가 다시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지나간다. 나는 다시 감사합니다를 말한다.



지금도 여전히 교복을 입고 땅을 보며 걷는 아이들을 보면 눈물이 난다. 가서 안아주고 싶다. 나는 분노로 오랜 시간을 보냈지만, 나 역시도 만약 그 당시에 누군가 나를 그냥 안아주기만 했었어도 그런 시간들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고등학교 후배도 분명 자살하지 않았을니까.






유명인의 자살도 아프다.

심지어 단 한번도 팬이었던 적이 없는 사람인데도 그렇다. 최근에 또 누군가가 죽었다.



나에게는 삶에 대한 가치관을 바꾸게 만든 유명인 3명의 자살이 있다. 이들의 자살이 당시 내가 믿었던 성공과 행복의 조건 - 능력, 돈, 인기, 외모, 학벌, 가족 - 에 대한 개념을 바꾸어 놓았다. 그 사람들은 샤이니 종현, 설리, 그리고 개그맨 박지선이다.



처음 샤이니 종현의 죽음을 들었을 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당시 종현은 내가 생각하는 행복과 성공의 3대 조건인 능력과 돈, 인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였다. 그걸 모두 갖춘 사람이 왜 스스로 사라졌까. 아니였지만 샤이니 인기곡들은 당연히 알고 있었는데 예능 프로에서 볼 때마다  저리 항상 자신감 없어보이고 그늘져 보이나, 궁금다. 저렇게 능력 있고 돈과 인많은데도 여느 타 연예인처럼 건방지거나 불편할 정도로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신기했다 . 오히려 붕붕 떠있는게 정상일 것 같은데, 겸손하다 못해 무언가 자신감 없고 눌려있는게 느껴져서- 팬은 아니었지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이안가는 부분은 몇 년이고 머리에 넣고 생각하고 고민하되뇌이는 내 성격 탓에 당시 샤이니 종현은 이 아니어도 종종 생각하인물 중 하나였다. 그래서 자살했다는 기사를 봤을 때 놀라는 것 이상으로 충격 받았다. 내가 생각하는 행복과 성공 조건에도 수정이 들어갔다.



2년 후 설리가 죽었다. 이때 나는 울었다. 설리도 팬은 아니었다. 하지만 늘 내가 외모에 대해 말할 때 자주 언급했던 연예인 중 하나였다. 예쁜 연예인들 중에서도 단연 설리외모가 최고라고 여겼다. 망국지색은 그녀를 두고 하는 말이라고 믿었으니까. 아역부터 활동해서 외모 변화를 바로 알 수 있는데 설리는 여타 아역들과도 달랐다. 날때부터 미인, 타고난 미인. 나는 내가 만약 설리같은 외모를 타고 났다면 세상을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상상까지 했었다. 그래서 늘, 어딘가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는 느낌을 그녀의 기사들을 보면서 받을 때마다 안타까웠다. 내가 너같은 외모와 돈과 인기가 있다면 너처럼 살지 않을텐데 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진심으로 부러웠다. 내가 만약 설리같은 외모라면 학교를 다니면서 그런 일들도 없었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연애도 쉽고 집에서도 더 아끼는 딸이 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래서 설리가 죽었을 때 충격을 받았다. 가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산책을 하다가 갑자기 눈물이 났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행복과 성공의 조건에 능력과 돈, 인기, 외모가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여기에는 학벌과 가족이라는 조건이 수정되었다.



1년 후 박지선이 죽었다. 망연자실했다. 학벌은 그렇다치더라도(사실 학벌은 아버지를 비롯하여 아버지 지인들과 나, 내 주변 인물들만 보더라도 명문대가 성공과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행복한 가족이라는 조건도 쓸모가 없다는 걸 알았을 때 절망했다. 박지선은 내가 생각하는 '몸도 마음도 정신 건강하다'라고 느껴지는 몇 안되는 연예인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그 필수 조건으로 나는 그녀의 행복하고 건강한 가족을 생각했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고, 역시 집이 바르게 되어야 나라도 잘되고 사람도 잘된다라고 생각했었다. 그녀에게는 내가 필수 조건이라고 생각한 외모는 없었지만 이미 그 생각은 설리가 죽고 사라진 후였다. 박지선에게는 그 이상을 커버하고도 남을 행복하고 건강한 가족이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사이 좋은 가족을 두어서 사이 좋은 가족과 같이 죽었다. 슬픔 이상으로 충격을 받았다. 이후 행복과 성공에 대한 나의 생각은 모두 바뀌었다. 서로 사랑하는 가족도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하는구나.






내가 생각하는 성공과 행복의 조건은 이제 그때와 완벽하게 다르다(그리고 언젠가 이 부분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자살은 슬프다. 사람은 결국 지금 현재 느끼는 이 고통이 영원할 것 같을 때 죽고 싶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때. 이 아픔은 영원할 것이고, 모두가 나를 버리고 떠날 것이며, 지금도 앞으로도, 나는 계속 혼자일거라 확신할 때. 그럴 때 사람은 죽는다.



그 누구도 자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무도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럴 바에 차라리 그냥 남욕하고 남탓도 실컷 하면서 맛있는 밥 많이 먹고 미치도록 웃고 여기 저기 마구 놀러다니면서 신나게 살았으면 좋겠다. 혼자라고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마음을 너무나도 잘 알아서 하는 말이다. ...혹시라도 지금 너무 괴롭고 아프고 속상하고 억울하고, 그래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들이 있다면 - 이 말을 꼭 하고 싶다. 건방지게 당신의 고통을 안다, 그 고통은 다 없어질 것이다 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누구처럼 종교를 가지라는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무책임한 말이다. 다만 이 한 가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돌이켜보면 내가 정말 혼자였던 적은 없었다.

내가 진정으로 버려졌던 적 없었다.

그러니 당신도 진정 혼자였던 적은 없다.



지금은 안다.

당시엔 몰랐지만 나 역시 수많은 타인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가장 절망적이라고 느껴졌던 시간들도 그 누구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던 순간들 조차도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렇게 좋아하고 믿었던 사람이 나를 버렸다고 느꼈을 때도, 그래서 나 자신이 또다시 쓸모없고 가치없다고 느꼈을 때 조차도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 누구의 애정도 관심도 사랑도 받지 못하고 영원히 느낄 수 없을 것 같은 절망에 빠질 때 조차도, 도와달라는 외침이 무시 당하고 외면 당할 때 조차도.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러니 지금 죽음을 생각하는 모든 이들도 혼자가 아니다. 그러니까 죽으면 안된다.



그때 나에게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은 내가 그 당시 그토록 원하고 필요로 했던 친구나 연인, 선생님이나 가족, 동료나 사랑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만히 돌이켜보면 내가 모르고 지나쳤던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으로 나는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떤 작가의 말처럼 "신의 개입 1%"가 분명히 있었다. 그 사람들과 그 시간들이 나를 살렸다. 여행에서 지나쳤던 수많은 사람들, 마라톤에서 만났던, 이유없이 나와 함께 뛰고 도와주고 응원해주던 이들, 과외했던 아이들과 어머님들, 지하철에서 쓰러진 내 곁에 있었던 사람들, 따듯한 인사들, 대화를, 악수, 포옹 그리고 - 수많은 책, 영화, 음악. 결정적인 순간에 나를 구했던 그 "신의 개입 1%"는 분명히 존재했다. 종교를 말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정말로. 그래서 죽으면 안된다. 스스로를 죽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고통은 반드시 지나간다.

그리고 지나가지 않아도 괜찮다.

지나가지 않으면 그걸 안고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우리는 더 강하고 따뜻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괜찮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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