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지. 너무나도 변해버린 이와이 슌지 감독에 적응을 못 하겠다. <러브레터>와 <릴리슈슈의 모든 것>의 감독에게 지난 20년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영화만 만드는 줄 알았는데 소설도 쓴다는 건 처음 알아서 반가운 마음에 바로 구해 읽었는데 - 너무나도 낯설어서 생각 정리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감독은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인터뷰를 통해 찾아본 책 <립반 윙클의 신부>에서 감독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성장하는 사람의 모습"이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느낀 건 한 사람의 성장이 아닌 퇴보였다.
자기 기만과 자기 연민으로 점착된 사람이 그런 자신을 숨기기 위해, 자신의 "진짜 모습"이 들통날까 걱정되어 오직 인터넷을 통해서만 자신의 솔직하고 정직한 생각을 이야기하고 인간관계를 맺다가 그렇게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벌로 여러 사람들에게 휘둘리며 일상과 삶이 망가지는 이야기로만 보였다.여기에 성장은 없다.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줏대 없고 자애 없는 인간이 결국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갔을 뿐이다. 성장에는 반드시 경험이 필요하지만 모든 경험이 성장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래도 한때 좋아했던 감독이라 이해해 보고 싶어서 여기저기 인터뷰도 찾아보고 2016년 북토크 영상도 찾아보고(링크 밑에 있음) 주인공 나나미가 썼던 SNS 닉네임 기원도 알아 보려고 자료 조사도 했지만, 내가 알던 '화이트 이와이 슌지'와 '블랙 이와이 슌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감독은 2011년 일본 대지진을 기점으로 해외에서 거주하다가 일본으로 다시 돌아왔고 이때 모든 것이 변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 작품이 '컬러풀'하다고 했지만 나에게는 이와이 슌지의 컬러 자체가 아예 없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무색무취무미. 2016년 북토크 영상을 보면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성장하는 사람의 모습"을 그리려고 했었고, 소설이 영화보다 더 잔인하게 그려졌다며 책과 영화의 결말이 조금 다르다고 감독은 말했지만 그런 상냥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책을 다 읽고 나니 영화가 보고 싶지 않아졌다.
농이 아니라 진짜 슬프다.
간혹 이렇게 좋아하던 예술가들이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면서 체력 저하로 더 이상 일정 수준 이상의 작품을 만들지 못하거나, 그도 아니면 자기만족으로 인한 게으른 자기복제로 더 이상 찾지 않게 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다행히 이와이 슌지는 이 경우는 아니다, 아닌데 - 앞으로 그 어떤 작품이 나와도 이 작품이 이와이 슌지 감독 영화, 글이라는 걸 모를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처음에는 오우삼 감독처럼 매번 확연하게 다른 색깔로 작품을 만들면서도 흥행과 평단 모두를 평정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봤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래서 그다음에는 혹 <데미안>처럼 10대와 20대 초반에는 환장했다가 그 이상되니 시들해졌던 '나'의 변화에 기인한 건가 고민해 봤는데 - 역시 아니었다. 그냥 이제는 안되겠더라. 세상은 넓고 읽고 싶고 보고 싶은 책과 영화들은 너무 많은데 앞으로 이와이 슌지를 찾게 될 것 같지 않다. 마치 오래되어 지겨워진 연인처럼, 대화할 것도 없고 더 이상 궁금하지도 기대도 안되는 사이가 된 것 같다. 그동안 같이 보낸 시간이 아깝지만 그래도 덕분에 성장한 부분도 있으니 우리 이제 그만 헤어져요.
줄거리를 짧게 요약하자면 -
SNS상에서만 진실한 자신감도 자기애도 없는 여자가 SNS에서 알게 된 사람들로 인해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이리저리 휘둘리며 일상과 인생이 망가지는 이야기.
줄거리를 길게 요약하자면 -
자신의 이야기를 SNS에 올리는 여자 나나미는 어느 날 이 SNS를 통해 알게 된 남자와 만나 사귀고 결혼한다. 남자가 그렇게 좋지도 싫지도 않은 여자는 연애할 나이가 되었으니 연애하고 결혼할 나이가 되었으니 결혼하자는 말에 결혼한다. 하지만 가족도 친구도 그 무엇도 자랑스럽기는 커녕 오히려 숨기고 싶어 할 정도로 자기자신에게 자신이 없는, 인생의 꿈도 계획도 목표도 없는 나나미는 이런 자신의 생각을 SNS에 꾸준히 올리며 남편이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될까 매일 두려워하며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이 SNS를 통해 알게 된 또다른 남자 아무로의 의뢰로 결혼 하객 대역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며 아무로와 아무로가 운영하는 회사 관련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게 된다. 곧 결혼을 하니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내고 애초 사이가 좋지 않고 왕래도 대화도 없었던 부모나 직장 동료, 친구들보다 아무로를 통해 하게 되는 대역 아르바이트를 더 편하게 느낀다. 곧이어 자신의 결혼식에서도 이 하객 대역을 의뢰하게 되고 결혼을 하고 나서도 단기적으로 들어오는 대역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일어난다. 자신의 결혼식에 부모 빼고 모두 대역 하객을 썼다는 사실이 들킬까봐 걱정이 된 나나미는 자신의 남편 역시 바람을 피거나 자신에게 무언가 숨기는 게 있지 않을까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살게 된다. 그래서 아무로에게 자신의 남편이 바람을 피는지 아닌지 거액을 주며 확인해 달라고 부탁하고 얼마 안가 역으로 남편과 시댁으로부터 바람을 핀다는 증거가 있다며 대대적으로 오해를 받아 이혼 당하고 쫓겨난다. 갈 곳 없는 나나미는 아무로부터 계속 이런 저런 도움과 일을 받으며 살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반전 하나.
소설의 경우 끝에 가서야 나나미의 결혼은 거짓 증거로 파탄시켜 계속 이런 저런 대역 일거리를 (다행히 야하거나 성적인 아르바이트는 없다) 주는 사람이 아무로라는 게 밝혀진다. 영화의 경우 보지 않았지만 2016년 북토크에서 이와이 슌지와 오지은 작가가 나눈 이야기를 들으면 이 반전이 영화에서는 아예 초반에 나온다고 한다. 결말도 소설과 영화가 조금 다르다고 감독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