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보의 계절 3

피고 지는 꽃처럼 : 우리는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난다.

by 당신과지금여기에

# 송별회


라테시절. 교직문화 (아니 우리 지역에만 국한되었던 것일 수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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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선생님들의 인사발령이 나면 새 학교로 선생님들을 데려다주는 풍습? 이 있었다. 사실 나도 전통의 끄트머리 시절에 걸려 딱 한번 그렇게 해봤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애도 아니고 혼자 가면 되지 라는 생각이 든다. 주로 관리자나 동료선생님들과 같이 가게 되었으니 관리자의 마음에 든 사람은 옮기는 학교에서도 좋은 평판을 함께 가져갈 수 있는 시스템이지 않았을까... 예전엔 관리자가 인사를 담당한다는 게 불합리하다고 느끼는 시절도 있었지만 나도 늙어보니 그게 아니다. (교직에서 선생님들을 보는 눈들은 너무나 많고 평판은 꽤나 중요하다.)


E학교의 송별회 시간이 되었다. 이전학교에서 7년 동안 먼지처럼 살았을 때는 할 말도 없고 눈물도 나지 않았었는데 1년 동안 있었던 E학교에서 떠나려고 보니 진짜 눈물이 나려고 했다. 멋진 인사말을 하고 싶은 욕심도 생겼다. (이때부터 숨겨뒀던 관종끼가 발산된다.)


" 프랑스의 철학자 샤르트르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인생은 B와 D사이의 C이다.

B는 birth, D는 death, C는 choice.

지금 저의 선택으로 떠나는 인사를 드리고 있는데요, 아직은 새로운 설렘보다는 헤어지는 아쉬운 이 더 큰 것 같습니다. ( E초등학교는 제가 choice 한 학교는 아니었지만 저에게 많은 Chance를 주었던 학교였습니다. ) 짧은 시간이었지만 행복한 학교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튼 2025년은 반드시, 기필코, 돈을 써서라도, 넘치도록 충분히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캬... 선생님이지만 회의시간에 말 한마디 못하던 쭈구리가 제법 괜찮은 작별인사를 할 것 같아 혼자 뿌듯했던 하루였다. 물론 괄호 안에 있는 말은 민망해서 말하지 못했지만, 꽤 C라임을 맞추어 문장흐름이 자연스럽지 않은가?


먼지시절 내가 이런 송별인사를 하는 사람을 봤다면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뭐지? 저 관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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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다. 난 삐뚤어진 애다 -_-ㅋㅋㅋㅋ)



# CHOICE


2월 내신발표가 나면 기다렸다는 듯이 새 학교 교감선생님께 업무메일이 온다.

"올 한 해 어떤 업무와 학년을 가져가시겠습니까?"

학교마다 양식은 다르지만 과거 3년의 행적(어떤 업무와 학년을 맡았는지)을 쓰는 곳이 있고 희망하는 업무와 학년을 쓰는 곳이 4군데나 있다. 최대한 원하는 곳으로 배치해주고자 하는 의도이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도 많다.

업무분장표를 보니 C학교는 행복학교로 담임들은 업무를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업무전담팀의 부장이 6명, 부장 아닌 전담이 5명이 있었다. 과거의 나라면 당연히 담임을 고를 테지만(업무보다 담임이 쉬워서 그런 게 절대 아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담임을 했던 사람은 습관적으로 담임을 고르게 된다.ㅠ 해본 게 낫지... 싶어서) 지역만기가 2년 남은 지금 나에겐 점수가 필요했다. 전담전수 1점, 그리고 합창대회를 나가면 0.7점의 상을 기본값으로 가져갈 수 있다고 한다. (연구부장이 둘째 친구 엄마여서 알게 된 정보 :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사람들이 보는 눈은 다 똑같은지 어차피 일할 거 점수받는 게 나아서 내가 선택한 자리도 경쟁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전입교사들 중에서 말이다. 기존에 있던 선생님들은 아무도 업무전담에 지원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5학년 과학전담에 합창부 지도를 선택했다.



# 새 학년맞이 교육과정 함께 세움 주간


이름도 거창한 새 학년맞이 교육과정 함께 세움 주간이 C학교는 월, 화, 수, 목, 금, 5일이라고 한다. (아.... E학교는 2일인데.... 하지만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말자. 어느 유튜버가 이렇게 말했다. 욕하지 말고 욕먹는 사람이 되라고. 맞다. 욕을 먹는다는 것은 일단 타인에게 영향력이 있다는 뜻이다.)

새 학년맞이 교육과정 함께 세움 주간이 시작되려는 일요일 오후 6시.

나는 137명이 속해 있는 단체카톡방에 초대되었다.


뭐야? 학교 교직원 카톡방이 있어?

젠장.


게다가 나는 교무행정팀이라서 따로 11명 카톡방에도 초대되었다.

젠장.


월요일 아침 교무선생님이 설렘과 기대를 담은 짧은 인사말을 준비하라는 메시지가 왔다.

젠장.


하지만 난 이제 달라졌다. 헤겔의 정반합을 아시는가. 안티테제가 테제를 받아들여 내 나름의 진테제가 형성되고 있다. 내 안의 새로운 절대정신은 가만히 주어진 대로 살지 않고 내 존재를 발휘하는 것이다. 물론 기존의 나였다면 내세울 거 없는 내가 어떻게 감히 그래~ 그냥 쭈구리로 살란다~ 했겠지만 40이 넘으면서 기세가 바뀌었다.


월요일 아침. 전입 교직원 소개


"안녕하세요. 밝게 빛나는 E학교에서 온 000이라고 합니다. C학교가 좋다고 해서 왔는데 좋. 나. 요?

교무선생님께서 아침에 짧게 인사말을 준비하라고 하셔서 C로 4행시를 준비했습니다. 운을 띄워주시겠습니까?

행복해야 할 우리,

우주보다 넓은 가능성을 지닌 우리,

운동, 공부, 재테크, 살림, 뭐든 다 잘하는 우리,

초등교사 파이팅! " (뜻은 비슷하지만 초성으로 학교가 지정되기에 각색함.)


남들은 블랙위주의 무채색의 옷을 입고 시작한 워크숍 1일 차.

민트색 코트를 입은 내가 관종의 서막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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