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직장인 영화 리뷰 Vol.11
루저와 퀸은 한끝 차이다.
친구가 이 영화를 보자고 했을 때, 무슨 영화 제목이 ‘직장상사 길들이기’인지 반문이 먼저 들었다. 영어 원작 제목은 ‘Send Help’, 영화가 끝났을 때는 굳이 이런 의역이 필요했을지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렇지만 이 리뷰를 쓰면서 나름 일리있는 의역이라는 생각이 든 영화이기도 했다. 국내 관객에게 ‘About Time’ 주연으로 유명한 Rachael McAdams 캐릭터 변신이 돋보임과 동시에 2022년 칸 영화제 수상작 ‘슬픔의 삼각형’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되는 영화였다. 과도한 캐릭터 설정 탓에 B급 영화 감성이 있기도 한다. 그렇지만 충분히 볼만한 흥미롭고 재미있는 영화였다.
영화에서 Rachael이 맡은 주인공 린다(Linda)는 ‘Maze Runner’의 주연 Dylan O'Brien이 연기한 브래들리(Bradley)의 회사에서 기획실 직원으로 일한다. 브래들리는 작고한 아버지 회사를 상속 받아 CEO에 오르는 데 선대 회장이 린다에게 약속한 임원 승진 권고를 무시하고 자신의 동문을 그 자리에 앉힌다. 하지만 브래들리는 회사의 주요 M&A 절차를 앞두고 린다의 능력이 필요했고, 이 절차를 마치면 승진을 재고하겠다는 구두 약속을 린다에게 하면서 둘은 함께 방콕으로 떠난다. 그러던 와중에 이들은 항공기 사고에 휘말리고 단 둘만 살아남아 무인도에 조난을 당한다. 여기서 극 중 초반 린다가 오지 탐험 기반 생존 예능 광팬이라는 설정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그간 TV와 책을 통해 쌓은 생존 기술을 실전으로 옮기며 무인도에서 부상당한 직장 상사 브래들리를 보살피고 물과 음식을 챙기며 본격적으로 살아남기 시작한다.
이 영화의 흥미로운 점은 극한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역할이 과거 남성 중심 서사에서 린다 중심으로 바뀐 점이다. 부잣집 샌님이자 상당한 다리 부상을 입은 브래들리를 대신해 린다는 불을 피우고, 식수를 만들며, 채집과 심지어는 멧돼지 사냥까지 성공한다. 무엇보다 시간이 갈수록 생존 기술은 늘어가고 조난 상황을 벗어나 구색을 갖춘 새로운 삶의 한 부분으로 진화하는 단계까지 발전한다. 동시에 기존의 브래들리의 확고한 사회적 지위가 무인도의 조난 상황에서 확고하게 전도됐음을, 브래들리가 자신의 비서 면접 때 지원자에게 ‘업무 이외에 어디까지 해줄 수 있어요?’를 린다가 되묻는 장면은 이 영화가 사회에 던지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 만화로 본 ‘무인도에서 살아남기’와 같은 생존 기술이 영화 중반까지 이어지며 항공기 사고로 벌어진 조난 속 ‘생존’에서 ‘삶’으로의 변화가 점층적으로 쌓인다.
그렇지만 관객은 이 영화 초반 린다가 조난 당한 섬 주변을 항해하는 보트를 보고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해’라고 말하며 숨어버린 장면 탓에 평온을 넘어서 행복으로 가는 영화 중반의 분위기 속 찜찜한 불안감이 커지게 된다. 조난 상황 속 브래들리가 영화 초반에 잠깐 SOS 신호를 해변에 쓴 것 외에는 도움과 구조와 관련 노력을 보여주지 않는다. 아마도 이런 배경에는 항공기 사고 직전의 한 장면이 영향을 줬을 것이다. 회사 주요 M&A 보고서를 완성해놓고도 자신의 과거 영상을 보면서 비웃는 브래들리와 동료들에게 회의를 느낀 린다는 그 보고서를 삭제한다.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 사회보다는 무인도에서 단 둘이지만 퀸(Queen)이 되는 것이 더 만족스러운 삶이 된 것이다. 동시에 이 지위를 이용해 철저하게 브래들리의 악행을 반성하게 하고 자신을 믿고 따르게 시킨다. 이 지점이 이 영화의 의역의 당위성을 공감하게 해주는 부분이다.
하지만 결국 지위가 사람을 변하게 만든다는 격언이 있듯이 린다 역시 변하게 된다. 퀸의 지위와 역할에 만족한 린다는 브래들리의 약혼자가 포기하지 않고 자신들을 구조하러 무인도에 도착한 이후 말도 안 되는 선택으로 관객을 놀라게 만든다. 영화는 결국 이 순간부터 급속도로 긴장감 있게 펼쳐지며, 결국 브래들리는 린다의 전모를 인지하게 된다. 평온한 둘의 관계는 엄청난 속도로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동시에 관객도 브래들리와 함께 린다가 감춰온 사실을 인지하면서 린다의 역할과 행동을 다시 곱씹게 된다. 특히 캐릭터 변화의 작위적 설정은 많은데 당위성이나 논리 구조상 연결고리가 약해 B급 영화 감성을 지울 수 없는 것이 아쉬운 부분이기도 했다. 영화 결말이 영화 초반 린다가 임원 승진을 못한 이유인 ‘골프’로 연결된다는 것도 감독 Sam Raimi의 제작 의도가 심상치 않음을 암시하는 듯했다.
‘직장상사 길들이기’는 전체적으로는 페미니즘 기반 자본주의의 풍자와 비판 의식이 서린 스릴러 영화였다. 클리셰 요소도 많고 당위성과 설득을 위해 과도한 설정도 많은 게 단점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두 배우는 최선의 연기를 펼쳤으며, 확고한 영화의 주제 의식을 담아 내는데 스토리 전개도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앞서 언급한 영화 ‘슬픔의 삼각형’과 같이 고도로 발전된 자본주의는 결국 쉽게 연결될 수 없는 무인도와 같은 오지로 닿는다는 영화 속 장치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는 계기였다. 린다는 루저(Loser)가 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 사회에서 발버둥쳤지만, 퀸이 될 수 있었던 건 무인도에서 조난 상황이었다는 게 이 영화의 역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결국 그 퀸의 지위를 갖기 위해 루저의 선택을 했다는 게 이 영화의 메시지였다. 하지만 영화 결말은 꽤 흥미로우니 가능하다면 극장에서 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