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in a bubble, still life

코소보, 터키 이야기 2

by Amrita



#8. 2017년 연말. 한국에서 가족들이 유럽에 왔다. 우리는 스페인을 방문했다. 나의 주말에는 늘 하이킹을 함께 다니는 스위스, 체코 친구 무리가 있었다. 작은 나라이지만 코소보에 있는 많은 산들을 주말마다 갔다. 물론,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이방인이었지만 그럭저럭 잘 지냈다. 가끔 길거리 성희롱이 너무 심해지면 친한 친구들에게 울분을 토하고 외국인 직원들을 관리하는 회사 동료에게 사정을 이야기했다. 본인도 동남아에서 일할 때 늘 관심의 대상이었다며 나를 위로해 줬다. 너무 개념치 말라는 그의 말이 위안이 되었다. 새해가 되고 회사에 나 말고 한국인 동료가 왔다. 기쁘고 특이한 감정을 느꼈다. 제네바에서 일하다 온 그녀는 친절했고 나와 꽤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잘 통했다. 친하게 지내던 스위스 체코 친구들의 계약이 종료되면서 때 마침 온 한국인 동료. 우리는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그 쯤 내가 일 년 정도 담당했던 프로젝트가 거의 마무리되었고 다른 팀에서 같이 일해보지 않겠냐고 물어왔다. 나는 흔쾌히 그 팀으로 가서 남은 계약 기간을 채웠다. 코소보의 일 경험은 다채롭고 풍족했다. 좋은 상사들을 많이 만났다. 2018년 7월. 그리고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2018년의 여름이었다.


#8-1. 한국에 오자마자 심리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나에게 일어난 부정적인 사건들과 일 년이 넘게 지속된 성희롱 등으로 과거의 부정적인 기억들이 견디기가 어려웠다. 늘 밝은 면만 보려는 나의 성격 때문에 이 경험은 돌이켜보니 아주 내 인생에서 소중한 경험이었다. 힘든 일이 있어도 참고 참으니 소화되지 못한 내적 어두움이 그림자가 되었고 그 흔적은 시간이 지난다고 옅어지긴 했지만 없어지지 않았다. 심리상담은 도움이 되었고 시간이 지나고 그룹상담으로 넘어가면서 다행히 한국에 새롭게 교류할 수 있는 사람들이 생겼다. 자연스럽게 다시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나의 멘탈이 근본적으로, 내 생각보다 강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나를 잘 모른다는 것을 알고 마음수련에 힘쓰기 시작했던 시점이었다.




#9. 한국에 온 지 1년쯤 지나서 또다시 유럽으로 가게 되었다. 2019년이 다시 유럽에서 시작된 것이다. 새로운 직장이 생겼다. 이번엔 터키. 한국에서도 유명한 이스탄불이었다. 나의 마음가짐은 이전과는 달랐다. 유럽을 좋아해서였던 나의 이유가 일을 하고 싶다로 바뀌었다. 나는 경력이 쌓고 싶었다. 그리고 이 커리어가 내 인생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다행히 코소보에서 많았던 사건 사고가 터키에선 없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사건이나 사고가 발생해도 감내해야한다면, 나의 상황에 대한 이해를 도망치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이겠다는 결심을 어렴풋이 한 것 같다.


#9-1. 외국인들이 많이 사는 곳에 거주지를 결정한 게 다행이었다. 코소보에서 함께 일하던 스위스-캐나다인 동료가 꼭 이 동네에 살아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그녀에게 고맙다. 동네 슈퍼 (까르푸)에서는 한국 두부도 팔았다. 근데 두부의 유통기한이 3년이라니요..? 이스탄불 회사에서 알게 된 한국인 교포 언니에게 물었더니 그 두부를 절대 사 먹어선 안된다고 했다.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할 것이라는 그녀의 말에 동의했지만 호기심 많은 성격에 결국 그 두부를 먹고야 말았다. 한국 두부와 다를 바 없었다 (하하) 수출되는 한국 상품을 외국에서 사 먹으면 뭔가 20% 부족한 느낌이지만 존재만으로도 감사하다.


#9-2. 2019년 가을쯤부터 시작된 코로나가, 그로 인해 시작된 재택근무가, 외향형인 나에게 꽤나 어려운 매일매일의 도전으로 다가왔다.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하루종일 고민했다. 일은 끝나고 나면 온전히 내 시간인데, 나갈 수 없는 날들도 많았다. 홈트레이닝을 처음 시작했다. 요가를 오랫동안 했던 나는, 온라인 요가 수업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코로나로 요가원이 문을 닫아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프랑스어 공부도 다시 시작했다. 프랑스어 수업 역시 온라인이었지만 터키 청년들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재밌었고 흥겨운 시간이었다. 일을 하지 않는 시간엔 집 주변에 있는 가게에 가서 knitting 할 재료들을 사 왔다. 때로는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있는 것 같은 시간이 길어지지는 느낌이 들면 동네 호텔로 가서 하룻밤 자고 오곤 했다. 새롭게 시작하는 느낌이라 늘 방에만 갇혀있다는 느낌이 조금은 지워졌다. 그리고 호텔 조식은 나를 기쁘게 한다. 24시간을 온전히 나와 함께 보내야하는 생활을 언제할 수 있을까. 내가 나를 키워야하는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기회, 어쩌면 고통. 시간을 견디기 위해 억지로 사람관계를 하는 걸 잘 못하는 나는, 같은 나라가 아니어도 외국에 살고 있는 오래 알고 지낸 친구들과 주로 교류하고 지냈다. 가끔 자주 가던 동네 카페를 가면 카페 아저씨가 위스키를 한 잔을 건넸다.


#9-3. 코로나와 더불어 국가 경제위기로 터키 리라의 하락이 계속되었다. 국제개발이라는 일을 하면서 나는 삶의 깊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많은 월급은 아니지만 현지의 사람들의 경제상황이 악화될 때도 외국인들의 경제상황은 크게 변동이 없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런 상황을 마음 깊이 불편하게 느끼고 있었다. 한국에서 물질을 사랑했던 나는, 나의 변화가 조금은 놀라웠지만 이 불편한 마음은 아직까지도 의미심장하게 다가와서 소비와 자본, 물질주의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다. 아마, 나의 일에 내가 꽤나 진심이었구나를 느끼게 된 것 같기도..? 어느새 내 삶을 이 일에 비추어 보고 있으니 말이다.


#10. 처음으로 코로나 예방 주사를 맞으러 터키 병원에 갔다. 외국에서 한 번도 병원 신세를 진적이 없는 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래서 더더욱 이 나라의 의료 시스템이 궁금했다. 한국처럼 예약부터 진료까지 앱으로 예약해서 편하게 주사를 맞았다. 현지계약이 끝날쯤 터키를 떠나기로 결정하고, 친구들이 왔다. 코소보에서 함께 일하던 친구들이 이스탄불에 와서 나의 마지막 시간들을 같이 마무리해 주었다.




그 시점부터는 내가 살아온 시간들이 외국일지라도 이방인이라도, 버블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4년쯤 걸린 것 같다. 주변에 사람들이 억지가 아닌, 나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관계이고 그 관계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내가 나를 나라는 사람을, 나의 삶을 온전히 수용할 용기를 낼 수 있었던 시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