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기는 사람들, 코미디언 김동하 인터뷰
*2편에서 계속됩니다
사실 동하 님이 잘 되고 스탠드업과 스탠드업하는 김동하는 주목을 많이 받았지만, 이전의 김동하에 대한 얘기가 많이 없더라구요? 특히 ‘철가방’ 시절 얘기가 없어요.
‘철가방’은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내 인터뷰가 다 스탠드업으로 나가는데 ‘철가방’은 완전히 다른 분야인 꽁트니까 어쩔 수 없죠.
‘청도 철가방 극장’은 전유성 선생님이 만든 코미디언 양성 극단 ‘코미디 시장’의 코미디 전용 극장이다. 2011년 5월 탄생해 매일매일 매진이 되는 등, 지방에서도 코미디를 할 수 있다는 새로운 지평을 연 곳이었다. 2018년 4월, 청도군과의 갈등과 단원 부족으로 폐관되었다. 코미디언들 사이에서는 ‘철가방’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나는 김동하의 코미디를 듣고 싶기 때문에 ‘철가방’ 이야기를 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다 포함해야 된다?
그쵸. 다른 인터뷰들 봤는데 ‘철가방’은 그냥 ‘그런 시절이 있었죠’하고 넘어가는 거예요. 동하님이 거기 5년을 있었는데. 그곳에서 어떤 코미디를 배웠고 어떻게 살았는지 듣고 싶어요.
청도 시절…(동하가 생각에 잠겼다)
동하는 2013년, 교직 생활을 그만두고 ‘코미디 시장’ 4기로 들어가 청도 생활을 시작한다. 코미디의 꿈을 시작하게 된 순간이었다.
솔직히 사람들이 ‘철가방’에 대해서 아무도 몰라요. 저도 정말 뉴스나 기사 몇 줄로 본 게 다거든요? 지금 ‘철가방’ 출신 코미디언 분들이 많이 있나요?
많이 없죠. 활동하는 코미디언들이 ‘낄낄상회’하고 있는 KBS 28기 장윤석, 코미디빅리그 양배차, KBS 29기 김니나, 니나도 있었고. 스탠드업 지금 같이 하고 있는 (김)종찬이도 있고.
그분들은 다 ‘철가방’ 문 닫기 전에 공채 개그맨 합격해서 나가신 거죠?
너무 잘 된 케이스죠. 그런데 청도라. 청도에서 뭘 배우고 어떤 코미디 했는지 잘 모르겠는데요. 정의 내리기가 애매하네. 요새 보면 인스타그램 보니까 코미디를 체계화해서 정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스탠드업도 문장을 어디서 배치하는지 이런 걸 문서화를 하고. 그런데 나는 그런 타입은 아니거든요. 철저하게 매 순간 감으로 배우는, 육감으로 움직이는 애라.
오늘도 제일 인터뷰하기 힘든 사람을 골랐네요(웃음).
힘들지. 배우려는 사람들이 나한테 뭘 많이 물어봐요. 나는 ‘이렇게 이렇게 하면 되지. 왜 안 돼?’ 이러고 있어. 그들은 자꾸 더 디테일하게 알려달래. 아, 이게 뭔가 다르구나라는 걸 몰랐어요.
저도 사람들이랑 인터뷰 준비하면서 새삼 깨달았어요. 질문하면 ‘그냥 당연하게 했는데요’ 이런 답변이 많은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당연하다’는 답변이 안 나오게 질문해야하는지 생각을 계속 해요.
아, 얘기해 줄 건 있다. 청도에서 배운 거. 코미디언으로서의 마인드. 코미디언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마인드를 전유성 선생님한테 많이 배웠죠. 예를 들면, 당연한 거를 당연하게 생각하지 마라. 세상이 만들어 놓아서 당연하다고 느끼는 거지, 그것이 꼭 당연한 건 아니다. 코미디언은 이런 시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걸 전유성 선생님께서 설파를 하신 거군요.
청도 가자마자 놀랐던 일화가, 처음 봬서 ‘안녕하세요’ 인사하는데 선생님이 ‘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하냐’ 그러시는 거예요. 살면서 이런 질문을 처음 듣지. 그때 나이가 스물 여덟이었는데, 순간 뇌정지가 왔어요. 그러면 ‘인사를 뭐라고 해야 됩니까’하니까. ‘코미디를 한다는 애가 왜 직장인들이 쓰는 화법을 쓰고 있냐. 너가 하는 인사는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할 수 있는 인사야’. 그러니까 너만의 표현법으로 인사하라는 말씀을 하신 거죠. ‘안녕하세요’가 아니어도 사람의 안부를 물어볼 수 있는 수많은 표현을 찾아보란 얘기였어요.
우리가 흔히 하는 멘트가 아닌 다른 안부 인사를 해라.
그렇죠. 살아오면서 배우고 쌓여온 인식이나 관념들을 철저히 깨부수는 훈련을 많이 했어요. 인사도 예를 들면 ‘오늘은 해가 정말 따사로운 날이네요’ 이런 멘트도 가능한 거죠.
‘안녕하삼’ 이런 거 하라는 게 아니고.
(질색하며)아잇. 그런 거 아니고. 그런 거 가르쳤으면 내가 먼저 그만 뒀지. 우리가 보통 일 끝나고 나면 동료들한테 뭐라고 인사해요?
‘수고하셨습니다’나 ‘고생하셨습니다’?
그렇게들 하잖아요. 그걸 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너희가 좋아하는 일 하러 왔는데 왜 서로 “수고했다”, “고생했다” 표현을 쓰냐. 그건 하기 싫은 사람들끼리 하는 표현이야’, ‘끝나고 나면 “즐거웠습니다”같은 표현을 써라’ 이런 말씀들을 했어요. 이런 사소한 표현과 관련된 일들. 들으면 맞는 말인데 그 전까지는 인식을 못한 거잖아요?
엄청 재밌고 웃기는 훈련은 아니지만, 모두가 세상이 앞으로 가라고 하면 ‘왜 앞으로만 가? 뒤로 갈 수도 있지’ 스러운 인식을 많이 배웠죠.
청도에 가서는 내가 웃긴 사람이라는 걸 어떻게 느끼게 됐어요?
코미디언들 다 비슷하겠지만 동네에선 내가 제일 웃긴 친구였죠. 대학교 때도 그래서 학생들도 엄청 웃겨주고, 주말에는 돌잔치 MC하고 그랬어요. 근데 청도에 가서 개그를 배워보니까 개그 문법은 또 아예 다른 문법인 거지.
웃긴 사람들 다 모이는 곳에서 더 웃겨야 코미디언 된다는 말 많이 하잖아요.
내가 기가 막히게 잘생긴 건 아니지만, 모이니까 이 중에 내가 인물이 괜찮아. 오히려 캐릭터가 없어져버리는 거죠. 무대 올라가기만 하면 뻥뻥 터지는 애들이 있어. 키 크고 못생긴 애, 키 작고 못생긴 애, 뚱뚱하고 못생긴 애… 이러다 보니 이쪽으로 가면 절대 못 이긴다는 걸 알았죠. 바람은 제법 잘 잡았는데, 꽁트는 처음이다 보니까 잘 안 됐어요.
특히 무대 위에서 목소리를 써야 되는데 목을 잘 못 쓰는 거예요. ‘야 연습하는 수밖에 없겠다’ 싶었죠. 혼자 아침 8시에 일어나가지고 혼자 시골길 뛰면서 ‘가갸거겨’ 발성 연습하고 그랬단 말이야. 그러다 보니 무대 위에서의 호흡을 조금 알게 되고, 웃기는 법을 알아가고, 끝나면 나한테 사진 찍어달라는 사람이 생기니까 ‘웃기다’는 징표를 획득한 거죠. 4년 차 즈음에 관절염이 있는 할머니 캐릭터 연기를 했었는데, 관객들이 눈물 흘리면서 웃는 걸 보고 또 느꼈죠. 나 좀 웃기는 구나. 난 코미디해야 된다.
이렇게 청도에서 4,5년 살다가, 고향에 있는 직장인 친구들을 만나서 대화를 해보니 ‘내가 달라지고 있구나’ 깨닫게 되는 거죠.
일반적으로 사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딱 깨닫는 구나.
딱 만나니까 알겠더라고. 좀 고리타분한 말들을 하고 그러니까. 전유성 선생님이 코미디언들끼리 있을 때는 직장인들이 하는 이야기 하지 말라고 하거든요. 만나는 술자리에서 흔히 하는 ‘날씨가 어떻더라’, ‘뉴스에 뭐 나오더라’ 같이 뻔한 이야기 하지 말라고. 코미디언답게 매일 장난치고 시바이치고 코미디 얘기를 하라고 하셨죠. 이제 그거랑 더불어서 ‘철가방 극장’이라는 매일 나가는 무대가 있으니 무대공포증? 이런 건 아예 없었지. 기계처럼 일주일에 무대를 열 번, 열 두 번을 올라가니까 실력은 늘어날 수밖에 없었죠.
에? 일주일에 어떻게 열 번, 열 두 번을 공연해요? 하루에 두 번씩 하는 건가?
그렇죠. 월요일 빼고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매일 공연했으니까. 화수목금은 하루에 한 번, 토요일은 세 번씩 해서 10번이 넘지. 하루에 공연을 세 번 한다고요? 하루에 세 번. 11시, 14시, 17시.
11시 공연을 보러 오세요?
그때는 무조건 만석이었죠. 뭐 작은 소극장이긴 했지만 그래도 사람 많이 왔죠. 그 와중에 단체 관객이 온다? 그러면 일주일에 한 열 다섯 번 공연도 하는 거야.
와, 진짜 빡셌구나. 청도 철가방 극장 이야기를 신문 기사로밖에 본 적이 없어요. 아무리 찾아봐도 그 실체를 볼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거예요. 직접 가지 않는 이상.
실제로 보면 그 극장이 한국에 있는 코미디 극장 중에 제일 컸어요. 사진으로 봤죠. 진짜 크던데. 또 거기는 서울처럼 문화 인프라가 있는 게 없는 시골이라 더 커보이지.
거긴 진짜 철가방밖에 없었잖아요.
없어. 너무 없어. 하루에 버스 두 번 들어와요. 친구들이 우스갯소리로 ‘너 왜 연애 안 해’ 그러면 ‘만날 수가 없다. 여기에 할머니 아니면 암소밖에 없다’ 이렇게 농담하고는 했죠. 그 정도로 아무 것도 없는 곳이어서(웃음). 밥도 다 직접 해 먹었어요. 그래서 ‘코미디는 안 늘어도 요리는 는다’ 이런 말도 있었지.
‘철가방’이 2016년에 닫았나요?
2018년 4월에 닫았어요. 생각보다 더 오래했구나. 제가 2013년부터 2018년까지 있었고, 5월에 서울로 왔죠.
그러면 극장 문 닫을 때 같이 있었던 거예요?
마지막 공연 최종 엔딩 멘트 내가 했죠. 와 진짜? ‘언젠가 또 돌아오겠습니다’ 하면서. 같이 있던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코미디 엔딩 무대였다’라고 하더라고요. 좀 슬펐지. 고향이 없어지는 느낌이었으니까.
만약에 극장 문 안 닫았으면 계속 했을까요?
우와… 진짜 의문이다.
어쨌든 5년을 했잖아요. 거의 생길 때부터 한 거예요?
생길 때부터는 아니고, 후배 기수였어요. ‘철가방 극장’이 11년도에 생겼어요. 기수제가 있었어서 제가 4기에 뽑혔죠.
문 닫을 때 동하님이 최고참이었겠네요.
그치. 내 위로 1, 2, 3기 아무도 없었지. 1년 넘게 내가 계속 왕고였는데… 야 이게 근데… 문 안 닫았으면…
‘철가방 극장이 문을 안 닫았다면?’ 이라는 질문에 동하는 한참이나 생각에 잠겼다. 내가 본 김동하 중에 가장 진지하고, 깊은 고민에 빠진 모습이었다.
안 닫았으면 계속했을지 어땠을지 모르겠다?
와, 진짜 어렵다. 왜냐면 그때 시야가 트이지 않았으니까. 극장 밖으로 나와야겠다는 생각을 내가 했을까?
나간다는 생각해 본 적 자체가 없었어요?
‘서울에서 해야지’라는 생각은 있었죠. 그래서 계속 공채 시험을 봤던 거고. 그런데 지방 사람들은 막연한 두려움이 있단 말이에요. 서울 가면 물가도 더 비쌀 거 같고, 집도, 친구도, 부모도 없는데 어떻게 살지 모르겠는 거죠. 이런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극장 없어지고 고향 간 애들도 많아요. 그 와중에 나는 무대도 있었고, 전주 MBC에서 리포터로 방송도 하고 있어서 나름 만족하는 삶을 살고 있었단 말이죠. 돈 여유는 없었어도.
음… 그래도 극장이 닫았으면 서울에 올라오지 않았을까요? 그래도 한 번은 가보자는 마음으로.
18년 5월에 서울 올라오면서 전주 MBC도 그만둔 거예요?
하고 있었어요. 아 계속 왔다 갔다 하면서 방송을 한 거예요? 왜냐면 유일한 돈벌이가 그거밖에 없었으니까. 한 번 나가면 19만 3천 4백 원.
에? 뭐하면 그 돈을 받는다고요?
리포터 한 번 나가면 세금 떼서 받는 돈이 19만 3천 4백 원. 그걸 일주일에 한 번 하니까 한 달에 한 76만 원? 이게 당시 유일한 벌이였지. 그걸로 월세 내고, 코미디 클럽 갈 때 차비 내고. 아, 코미디 클럽 가면 공연이랑 알바 같이 하면서 살았다. 가끔 행사 들어오면 행사하고 그렇게 서울살이 시작했죠.
극장이 문 닫는 소식을 들었을 거잖아요. 그때 기억에 폐장 기사도 엄청 나왔거든요. 문 닫을 때까지 그냥 있다가 닫고 나서 올라온 거예요, 아니면 닫을 때쯤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이 있었어요?
닫는 건 알고 있었죠. 왜 그럴 수밖에 없었냐면, 마지막에 다섯 명이 남았어요. 극장에 있는 인원이 나 포함해서 총 다섯 명. 그전에 많았을 때는 인원이 한 서른 명 넘게도 있었는데. 문제가 뭐냐면, 약 70분 정도 공연을 그 인원들이 만드는 거거든요? 이제 다섯 명이 음향도 잡아야 되고, 조명도 만져야 되고, 안내도 하지…
스태프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거잖아요.
없어. 없지. 우리가 하는 거야. 사람이 많을 때는 다 하나씩 역할이 있었는데, 막판엔 다섯 명이 이걸 하려 하니까 말이 안 되지. 조정실이 2층에 있고 공연장은 1층에 있으니 진짜 운동하는 것처럼 정신없이 뛰어 다니면서 쳐내고 그랬는데. 결국 한 명이 그만둔다고 한 거죠.
그 다섯 명 중에 한 명이?
당시 개콘도 죽어갈 때고 하니까 그 한 명이 자기도 집에 간다고 하는 거예요. 네 명은 공연이 절대 안 돼. 어른들한테 ‘이건 정말 어렵습니다’ 말씀을 드리니 극장 문을 닫는 게 최종 합의가 됐죠. 전유성 선생님은 우리를 책임지려고 조금 기다려보면 서울에서 소개해 주겠다고 하셨죠.
근데 나는 무대에 서야 되는 사람인데, 무대가 사라졌으니 청도에 더 남아있을 이유가 없는 거지. 선생님 너무 존경하지만, ‘그럼 저는 서울가겠습니다’ 말씀드리니 ‘왜’ 이러셔서 ‘그냥 서울 가서 한번 해볼게요’ 하고 올라온 거죠.
대책은 아무것도 없었죠. 극장 마무리 잘하자는 생각뿐. 그리고 속으로는 꽁트를 안 하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죠. 내 판단에 꽁트는 답이 없다.
개콘도 그때 하락세였죠.
하락세였고, 내 나이가 서른 셋이었으니 더 이상 공채도 안 될 거 같았죠. 당시에는 연예기획사 예능 파트로 오디션을 보려는 생각이었어요. 나름 잘 웃기고 있었고, 전투력이 엄청 세서 해보자하고 서울에 올라왔죠. 근데 그 와중에 스탠드업이라는 게 한다네? ‘이게 뭐야’ 하고 보러 갔는데 보면서 ‘어? 내가 쟤들보다 더 잘하겠는데?’ 싶은 생각이 드는 거예요. 딱 해봤는데 잘하지는 못했어도 재미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하고 있는 거예요.
*4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