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는 책임이 따르므로
한동안 손에 새끼 고양이가 쏙쏙 들어오던 시절이 있었다. 상수동 주택가에 자취를 할 때인데, 간밤에 아기 고양이 울음소리에 잠이 깨 골목으로 나갔다가 남의 집 담을 넘고 집과 집 사이 좁은 길을 지나 기어코 새끼 고양이를 구출했다는 착각 속에 집으로 데려오곤 했다.
주차된 차 밑에서도 손을 내밀면 아가 고양이가 내 손에 잡혀줬다. 벌이도 딱히 없던 학생 시절인데 동물병원에 데려가 검사를 하고 네덜란드제 새끼 고양이용 분유를 사 먹이고 하니, 수의사 아저씨께서는 "어이구, 또 데려왔어!" 하시며 애기들 아플 때 발라주라고 안연고를 공짜로 주셨다.
냥줍을 덜컥해버리고 수습을 위하여 잠시 동안 함께 사는 반려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각종 고양이 커뮤니티에 입양 글을 올려 냥줍 한 아이들을 사람의 집으로 보내곤 했다.
한 참 후에나 냥줍과 입양의 삽질 시퀀스가 과연 잘 한 짓인 지 대해 의문이 들었다. 우선 구출했다 내지 구조했다는 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엄마 고양이가 이소를 하느라 아가들을 한 마리씩 물어 나르던 중이었거나, 좀 똥꼬 발랄해진 새끼 고양이가 엄마를 따라가다가 뒤쳐져 그 자리에서 엄마를 부르느라 울어댄 건데 내가 쓸데없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납치 내지는 유괴한 꼴이 되었다는 것을 한참 후에나 알았다.
뿐만 아니라 당시엔 내가 건사할 능력도 안되거니와 반려묘를 들이는 문제에 대해 반려인이 동물을 무서워하고, 동물의 털에 민감하고, 동물과 함께 살 의향이 없음은 해결되지 않은 인생 난제였다. 내가 좋아하고 부지런 떨고 희생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살다 보니 얼마간의 경제적 여유가 생겼다. 등급 높은 유기농 사료를 사 먹일 수 있을 것 같고, 자연식도 기웃거리고, 병원 가는 것은 동물은 의료 보험이 없으니 여전히 다소 부담스러우나 마땅히 해야 하는 것에 대한 저항감이 없어졌다.
그러나 책임감이 더 커졌다. 15년 동안 나의 신변의 변화에 관계없이 한결같이 사랑해 줄 수 있을 것인가?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아니, 검은 털이 흰 털이 되도록 생로병사를 함께 하며 동고동락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일이 바쁘다고 방치하지 않고 돌볼 수 있을 것인가? 나의 욕심에 저 아름다운 존재를 괴롭히진 않고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인가? 지금 당장의 귀엽고 예쁜 것을 곁에 두고자 하는 알량한 욕망 때문은 아닐까?
'애완'이 아니라 '반려'의 개념이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날 위한 존재가 아니라 함께 공존하기 위한 존재이고 동물과 함께 산다는 것이 예쁘면 기꺼이 쳐다보고 하는 수준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반려동물과 함께 하는 것을 심각하고 무겁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좋으면 데리고 와야지."에서 같이 행복하려면 상당한 책임감과 희생과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고 마땅히 해야 할 것들을 할 수 없거나 하기 어렵다면 반려하지 않는 것이 그 존재가 더 행복하게 하는 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더 이상 냥줍을 하지도 않고 나의 동물에 대한 애정을 익히 알고 있는 지인들이 입양을 권할 지라도 당분간은 아닌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책임질 여건과 능력과 마음을 공히 갖추었을 때 아마 반려동물과 함께 하고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