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쪼꼬 이야기 2
10년째 나와 살고 있는 쪼꼬.
쪼꼬는 못난 엄마를 만난 까닭에 여러 가지 누명을 썼다.
쪼꼬가 나보다 훨씬 나은 것 같다.
나라면 분명, 억울해서 펄쩍펄쩍 뛰었을 것이다.
쪼꼬는 오늘도 집에 돌아온 나를 반가워하며 펄쩍펄쩍 뛰었을 뿐이다.
1.
쪼꼬와 내가 함께 한 10년 중 6년 반은 후배와 살았다.
사실 먼저 후배와 살았고 살다가 쪼꼬가 내게 왔다. 후배는 제나라고 하는 노르웨이 숲 고양이를 키우고 있었다. 후배와 살림을 합치고 나서 후배가 고양이를 키우고 있었으니까, 이제 나도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오래 생각한 끝에 쪼꼬를 데리고 올 용기를 낼 수 있었다.
후배와 살기로 결정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걱정했다. 아무리 친해도 원수가 되어서 헤어지는 걸 많이 봤다는 거다. 그러나 우리는 잘 살았다. 어찌 된 궁합인지 까칠한 나와, 서글서글한 후배와, 제나와 쪼꼬는 좋았다. 재미있게 살았다.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까지도 함께 살고 있을 거라고 확신할 만큼.
그런데 그런 생활이 쪼꼬에게 (그때는 제나도 함께) 억울한 누명을 쓰게 했다. 내가 이미 노처녀였던 것이다. 후배는 점점 노처녀가 되어갔다. 사람들은 말했다. 니들이 개랑 고양이를 키우니까 결혼을 못하는 거라고. 부족한 게 없으니까 결혼을 할 생각이 안 드는 거라고.
결혼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면 그전에 사귀었던 남자 때문이라거나 눈이 너무 높아서라거나 뭐 그런 이유들이 있어야지 개랑 고양이를 키우기 때문이라니! 부족한 게 없으니까 결혼할 생각이 안 든다는 건 부족하거나 불행해야 결혼을 생각하게 된다는 뜻인가?! 거 참, 어쨌든 쪼꼬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기가 찰 노릇인지. 쪼꼬는 한 번도 내 결혼을 반대한 적이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의 양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닌데, 쪼꼬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는 건 얼마나 이상한 논리인가. 어쨌건, 엄마가 노처녀였던 까닭에 쪼꼬는 엄마의 결혼을 방해하고 있다는 억울한 누명을 써야 했다.
사실, 쪼꼬는 내가 결혼하는 것을 도왔다. 남편이 쪼꼬를 많이 이뻐했다. 그래서 결혼을 결심하기가 쉬웠다. 나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거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가끔 남편에게 묻는다. "당신 쪼꼬때문에 나랑 결혼한 거 아니에요?"
2.
비염이 심했다. 쪼꼬를 안고 약국에 갔다.
약사가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며 말했다. "개를 없애요. 개를 없애야 나아져요."
다시는 그 약국에 가지 않았다.
나는 지금 10년째 쪼꼬를 키우고 있다.
3년째 비염이 없다. 문제는 내 건강상태였지 쪼꼬의 털이 아니었다.
3.
결국, 노처녀를 벗어났다. 늦은 결혼이었다. 쪼꼬가 억울한 누명을 벗게 된 것이다. 드디어!
그런데 쪼꼬는 또 다른 누명을 쓰게 된다.
못난 엄마는 아이가 없다. 사람들은 말한다. 개를 키우지 말고 애를 낳으라고.
아이가 없어서 쪼꼬를 키우는 것이 아니다. 쪼꼬 때문에 아이를 갖지 않는 것도 아니다. 우리에게 아이가 없는 이유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이 사람들은 말한다. 애를 낳으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고, 개 하고는 다르고.
거 참, 쪼꼬 입장에서는 또, 정말 억울할 일이다. 쪼꼬는 나에게 아이를 낳지 말라고 한 적이 없다. 나는 반려견과 아이를 함께 키울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함께 크는 것이 서로에게 더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와 함께 살았던 후배는 나와 비슷한 시기에 결혼해서 쪼꼬보다 털이 10배쯤 더 많이 빠지는 제나와 함께 어린아이를 키우고 있다. 아이는 아주 건강하게 잘 크고 있다. 지금도 가족처럼 만난다.
쪼꼬는 결백하다.
4.
나는 회식을 싫어한다. 사람들은 개 때문에 일찍 집에 가려고 하는 거냐고 했다. 개가 신경 쓰여서 그런다고 자기들끼리 말하기도 한다. 개가 나의 사회생활을 방해한다고 한다. 개를 키우는 건 너무 손이 많이 간다고 한다.
아니다. 집에 오면 쪼꼬가 있어서 좋다. 하지만 내가 집을 좋아하는 건 쪼꼬 때문이 아니다. 나는 그냥 회식이 싫다. 집에 있는 것이 좋다. 후배와 합치기 전, 그러니까 쪼꼬를 키우기 전에도 나의 목표는 언제나 집에 일찍 돌아오는 것이었다.
가끔, 개를 키우는 건 아이를 키우는 것만큼 손이 많이 가는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아니다. 쪼꼬는 어린아이처럼 칭얼댄 적이 없다. 혼자 잘 먹고 잘 싼다.
5.
어떤 모임이 있었다. 잡담 중에 개 키우는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신나서 쪼꼬 이야기를 했다.(반려견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개에 대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생기면 신이 난다.) 한 사람이 말했다. " 굶어 죽는 아이들이 있는 세상에서 개를 키우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해서 안 키운다"고. 분위기가 쏴- 해졌다. 사람들이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다른 이야기로 화재를 돌렸다.
마치 쪼꼬가 굶어 죽는 아이들의 밥을 빼앗아 먹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아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됐다.
그가 나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굶어 죽는 아이들을 돕는 행위'보다 객관적으로 가치 없다고 생각되는 행위를 하나도 하지 않았어야 했다. 옷을 사거나 외식을 하거나 골프를 치러 가거나 하는 행위는 객관적으로 굶어 죽는 아이들의 목숨을 구하는 행위보다 가치 없는 행위다. 그가 그런 일들을 하나도 하지 않았을 리는 없다. 이런 논리로 따지면 우리는 거의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쪼꼬는 굶어 죽는 아이들의 먹을 것을 빼앗아 먹은 적이 없다. 굶어 죽는 아이들이 생겨나는 것은 내가 속한 세계가 가진 구조적 문제이고, 내가 쪼꼬와 함께 사는 것과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다.(물론 돌고 돌고 돌다보면 관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부의 분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문제와 반려견을 키우는 문제를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쪼꼬는 내가 가장 힘들 때 내가 죽지 않도록 나를 사랑해주었다. 나를 가만히 안고, 살아야 한다고 속삭여 주었다. 내가 쪼꼬와 함께 사는 것은 사치가 아니다. 나는 재미로 쪼꼬를 키운 적이 없다.
무엇을 할지 선택하는 것도, 가치를 판단하고 순서를 정할 때 어떤 기준을 따를지 결정하는 것도 개인의 자유다. 그 우선순위가 무엇인가를 이유로 비난받아서는 안된다. 자기가 우선시하는 가치라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도 우선되는 가치라는 법은 없다.
어쨌건 나는 못난 사람이라서, 쪼꼬를 사랑하고 키우는 일(사실 쪼꼬에게 사랑받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에 대해서 변명도 못하고 쪼꼬가 얼마나 결백한지 말도 못 하고 또, 누명을 뒤집어쓰게 만들어 버렸다.
쪼꼬는 결백하다.
죄가 있다면 못난 엄마에게 있겠지.
나는 쪼꼬만큼 온전히 사랑하는 법을 알지 못하는, 욕심만 가득한 '사람'이니까.
오늘도 쪼꼬는 집에 돌아온 나를 반가워하며 펄쩍펄쩍 뛴다.
그리고 곧 내 무릎에 올라와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잠을 청한다.
매일같이 내게 쪼꼬가 선물하는
완전한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