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오, 나의 검은 생명수

by 수수한

오늘은 수요일.

월요일 갑자기 든 호기심으로 시작된 ‘커피 안 마시기 프로젝트’ 3일 차인 날이다. 절대 ‘커피 끊기’가 아니었다. 특별히 몸의 이상을 느껴서 시도한 것은 아니었다. 아마 지난주에 오래간만에 만난 친구들 모임에서 나눈 대화가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 듯하다. 저녁 식사 후 옮긴 장소는 커피숍이었는데 음료가 그리 다양한 곳이 아니었다. 커피 외에는 내가 고르고 싶은 음료가 눈에 띄게 보이지 않았는데 홍차를 마실까 고민하고 있던 중 친구들은 청귤차, 카모마일티, 무알콜 칵테일 등을 고르고 있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더 이상 저녁에 카페인이 든 음료를 시키는 무모한 시도는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로 이어졌다. 친구들의 선택이 모두 마쳐질 때쯤 나는 자몽차를 골랐다. 이어진 더 슬픈 이야기는 커피를 더 이상 마시지 못하는 친구들도 있다는 것이다. 가장 큰 이유는 커피를 마시면 잠을 자기 어렵고, 속이 좋지 않아 마시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특히 나와 가장 가까운 M은 서로의 집에 방문했을 때 이야기를 지속하는 동안 몇 번이고 커피를 리필하며 마시는 것을 익히 알고 있기에, 그의 대답이 가장 충격적이었다.

“홍차에도 카페인이 많이 들어있다던데..”

커피를 마시면 잠을 자기 어렵다고 말한 친구가 얼그레이를 시켰을 때 물었는데, 그는 커피의 카페인은 심하게 작용하는데 홍차의 카페인은 그리 작용을 하지 않는다는 대답을 하였다. 여기서 2차 충격을 받게 되었다. 사실 나는 커피와 잠의 상관관계를 그리 생각하고 있지 않아서 커피로 인하여 나의 잠이 영향을 받는지 여부를 잘 모르고 있었다. 한층 더 나아가 음료의 종류에 따른 카페인 작용 정도 여부는 당연히 알지 못했다. 어쩌면 굳이 알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들어간 그날 밤 1시쯤까지 이불속에서 폰을 들여다보았고 잠이 들었다. 요의가 느껴져 깬 3시 20분 무렵까지 뒤척이며 가려운 정강이를 긁었던 기억이 난다. 깊이 든 잠이 아니기에 잠의 모양을 취하고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 있었나 본데 그때 문득 약속에 일찍 도착하여 마신 오후의 커피 때문에 내가 이렇게 얕은 잠을 자고 있는 것인가 의문을 가졌다. 그러고보니 종종 잠의 형태를 빙자하여 생각이 오갈 때가 잦았다. 얕은 잠의 원인은 그날과 같이 평소와 다르게 많은 변화와 자극이 있었거나, 대화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의외로 너무나 피곤해서 였기도 하며, 짝꿍의 코골이, 이갈이, 쩝쩝대기 소리였기도 했다. 역시나 가장 주된 원인은 마지막 지점에 있다며 굳게 믿고 살아왔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숙면으로 들어가 더 이상 생각이 오가는 잠의 형태가 아니라 아주 까맣게 잊히는 잠의 순간이 있었는데 그것은 깨어있기 서너 시간 전, 즉 많은 부지런한 사람들이 미라클 모닝을 위해서 일어나는 그 언저리의 시간이었다. 내가 지독히도 가지고 싶어 하고 선망하는 시간이지만 나는 결코 가질 수 없는, 가장 달콤한 잠의 시간. 나는 이 달콤한 잠의 시간을 왜 잠의 초반에는 가지지 못하는 걸까.


그날의 생각이 영향을 미쳤던 것일까. 문득 월요일 아침에 커피를 마시지 말아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내 삶에 무엇을 넣는 것이 아니라 딱 한두 잔의 커피를 들어냈을 때 어떤 변화가 있는지 알고 싶었다. 조금 설레기도 했다. 아주 적은 노력인데, 거기다가 무엇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빼내면서 평소와 다른 일상을 느낄 수 있을 테니 작은 실험을 실행하는 과학자라도 된 기분이었다. 오늘밤 꿀잠을 자고 나면 나는 정말 가뿐한 아침을 맞게 될 것인가? 상상하면서.

평소에는 잘 손대지 않는 티백 뭉치를 뒤적이며 나름 향긋하고 우아한 녀석으로 골랐다. 커피를 마시지 않을 나에게 주는 포상이었다. (이름만 보고 골랐는데 나중에 보니 이것은 홍차류였다. 무카페인 차를 선택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밤이 되었을 때 졸음을 느꼈고 11시가 넘긴 시간 용감하게 폰을 접고 잠에 들었다. 평소보다 잠에 들어간 시간이 더 짧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다면 아침에 나는 기대한 것처럼 가뿐하고 산뜻한 몸과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여전히 너무나 졸렸다. 커피를 마시지 않았던 어제 하루 전체를 그렇게 졸리게 보내면서도 밤이 되어서도 역시 졸릴테고, 그때 푹 자고나면 내일은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나는 거야!라는 기대를 가졌는데, 나의 소중한 자유시간을 바쳐가며 무려 1시간 반이나 빨리 잠이 들었는데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컨디션이라니! 눈을 뜬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잠이 덜 깨서 그렇겠지 다독이며 밝아오는 날과 더불어 맑아지는 나의 정신을 기대했는데 웬걸.. 나는 여전히 너무나 졸렸다. 이 졸림은 그저 졸림이 아니라 몽롱하고 우직하고 무기력함이었다. 너무나 좋아하는 책을 들고 읽고 있으나 평소의 나와 달리 이 책의 어여쁜 문장을 받아 적을 힘도, 플래그 붙일 힘도, 아니 플래그를 찾으러 몸을 일으킬 의지도 없었다.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를 놓아버린 뇌를 가진 기분이었다. 의지와 함께 송두리째 날려버린 하루의 반을 보냈을 즈음, 이제 와서 커피를 마실 수는 없었다. 마셨다면 진즉에 마셨지! 이왕 이렇게 된 것 오늘도 커피를 마시지 않은 나를 관찰하는 날로 지정하고, 이것은 송두리째 날아간 하루가 아니라 나에 대한 임상실험의 날로 내 마음을 진정시켰다.


나는 커피를 먹고 싶을 것이라는 부작용만 생각했지, 이렇게 졸리고 무기력할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커피 금단 증상’이라는 검색어를 넣고 다양한 사람의 경험을 읽어 보았다. 종종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참고가 되고 위안이 되고 대비가 되니까. 읽어 보자니 세상에, 그들이 겪는 경험이 곧 나의 경험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래서 다시 커피를 마시는 일상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양을 줄이면서. 커피 섭취를 한 뒤 반짝이는 기분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커피를 마시는 순간 뇌의 혈관이 좁아지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한다. 생각해 보니 오늘 아침 평소 커피를 마시던 시간에 캐모마일 차를 마셨을 때 내 몸의 반응이 떠올랐다. 정신이 번쩍 드는 대신에 온몸이 따뜻해지고 땀마저 나던 경험. 무엇을 마시느냐에 따라 몸의 반응은 분명히 달랐다. 그런데 일순 좁아지는 뇌혈관이라니. 갑자기 끔찍해지면서 나는 커피로 인한 뇌혈관 수축이 아니라면 정상적인 일상을 영위할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이란 말인가,라는 생각을 우둔한 정신상태로 희미하게 했다.


가족들이 모인 오후은 몽롱함에서 다소 벗어난 기분이 들기도 하였으나 간헐적으로 뒤통수가에 말로 설명하기 힘든 느낌이 들기도 했다. 통증이라고까지 할 것은 전혀 아닌데 일종의 두근거림이라고 해야 하나. 이것이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한 카페인 편두통의 한 종류인가 싶기도 하고, 내가 너무 내 몸의 세세한 증상을 카페인의 부재로 몰고 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어젯밤도 11시가 넘은 시간에 폰을 과감하게 접고 잠이 들 수가 있었다.


다시 아침, 이틀간 커피를 섭취하지 않고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잠이 들었다면 오늘 아침만은 개운하고 상쾌하게 눈이 떠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세상에 오늘도 역시 그렇지 않았다. 오전 내내 비몽사몽을 유지하다가 어제 검색하다가 발견한 한 댓글이 내 마음에 계속 남아있던 것을 발견한다.

“ 어차피 늙어서 커피도 술도 마시지 못하는 날이 와요. 마시면 몸이 아프니까 저절로 멀어지게 되네요. 그날까지 마실 수 있을 때 마시세요.”

아아. 이런 현답이라니. 나의 소중한 이틀을 몽롱한 상태로 송두리째 바치면서 시도한 이 작은 실험 중 읽은 이 댓글은 몽롱한 상태를 몸소 겪고 있는 중이었기에 더욱 깊이 와닿았다. 친구들과의 모임에서도 말했었다. 이제 더 이상 너무 맛있는 것도 없어. 외식을 나가도 막 맛있어서, 무엇이 먹고 싶어서 먹는 것도 아니야. 따위의 대화. 술도 예전처럼 안 먹혀. 그렇게 많이 들어가지도 않아.

육아를 마치고 떡볶이와 맥주 한 캔이 소소한 일상이던 시절, 그때는 매일 그러고 싶을 줄 알았고 내심 걱정이 되었는데 어느새 그 일상은 언제 그만두었지 싶게 되었다. 만나면 끝을 모르게 이야기하고 새벽녘까지 마셨던 친구부부와의 모임에서도 우리는 12시를 갓 넘긴 시간에 곯아떨어지는 슬픈 위장과 체력을 가진 상태가 되었다. 나에게 커피도 언젠가 그렇게 되겠지. 굳이 맛있는 지금 억지로 그만 둘 필요가 있나. 게다가 이렇게 커피를 중단하다가 어쩌다가 마시면 카페인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감퇴해서 정작 마시고 싶을 때 마시지 못할지도 몰라.


생각을 이렇게 옮기고 나니 마음이 급해진다. 몽롱하게 날려버린 나의 이틀이 아까워질 지경이다.


불과 이틀 만에 커피 머신에 컵은 얹어 놓고 버튼을 꾹 누른다. 윙. 머신이 켜지고 물이 내려오고 커피가 갈리는 소리.

졸졸졸 내려오는 커피를 성스럽게 바라본다. 나의 검은 생명수.

딴짓하면서 마시지 않고 한 모금, 한 모금 귀하게 마셔본다. 내가 여태 너의 강력함을 너무나 쉬이 여기며 마셔왔어. 몇 모금을 마셔보니 번뜩인다. 내 뇌가 깨어난다. 활력이 생긴다. 여태까지 나를 움직인 것은 내가 아니라 카페인이었구나. 승복한다.

어제까지 읽었던 책을 재미있게 읽다가 맑은 정신을 주체하지 못하고 몸을 일으킨다. 화분의 흙을 매만져보고 마른 흙을 손가락 끝으로 느낀 뒤 물주전자를 덥석 쥐고 물을 받아 물시중을 든다. 나뿐 아니라 다른 생명을 돌볼 정신도 돌아온다. 그리고 이 돌아온 에너지는 입력이 아니라 출력에 써야 할 때임을 감지하고 아이패드와 키보드를 가져온 뒤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즉 커피가 여기까지 쓰게 해 준 것이다. 쓰는 동안 습관적으로 빈 잔을 홀짝이며. 한 방울도 남지 않은 잔이지만 홀짝이는 순간 묻은 커피 향이라도 맡으며.


그러나 이 작은 실험이 분명 무의미하지는 않았다. 아무런 생각 없이 마시던 커피라는 존재가 더욱 생생하게 도드라진 경험이었다고나 할까. 분명하게 알게 된 것은 커피가 내게 원동력이 된다는 이야기인데 어떻게 생각하면 카페인 없이는 살기 힘든 나약한 인간인 것을 확인한 것이 되어 우울하지만, 반면에 삶에 활력을 줄 수 있는 확실한 키를 가지고 있고 그것이 무엇인 지 알고 있다는 것은-그것이 담배나 마약이 아니고 타인에게 이맛살을 찌푸리지 않는 기호식품으로 분류되는 것에 깊이 감사하며- 감사한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나에게 관대하다. 커피는 다른 생명을 돌보게 만들고 나를 관대하게 만드는구나. 키보드 위에 날아다니는 손가락을 보니 어제의 나와 비교하여 새 삶을 얻은 것만 같다.

아, 아. 이로운 검은 생명수여.

이제 전보다 경건히, 감사하고 충분히 음미하며 마실 테다. 여태껏 안일하고 사치스럽게 목구멍에 넘겨버리던 태도를 버리겠어.


생명수 추출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