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이를 웹상에서 만났을 때 여리여리하면서도 존재감을 분명히 드러내는 잎의 무늬에 반하였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싱싱한 상추나 배춧잎을 연상하게 되었는데, 많고 많은 칼라데아 중 이 아이를 꼭 가지고 싶었다. 풍성한 다발의 칼라데아오르비폴리아는 그야말로 탐스러워 보였다.
여느 화원에 흔하게 있는 식물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 아이를 조우하였을 때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꼭 오늘 우리 집에 데리고 가야 한다는 것은 기정사실이었고 내가 할 일은 가장 싱싱해 보이는 것을 고르는 일이었다. 식물을 고를 때 싱싱하다는 표현은 생뚱맞아 보인다. 식용으로 쓰는 것에 싱싱하다는 말이 어울릴 것 같다는 내 마음속 작은 편견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때로는 생경한 단어의 조합이 주는 매력에 싱싱한 식물을 골라왔다는 문장을 기어이 내뱉고 싶어지는 것이다. 이 표현과 가장 어울릴만한 녀석으로 신중하게 골라왔다.
욕심이었다.
이 깨달음을 얻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처음의 싱싱함은 날로 퇴색되고 급격하진 않지만 충분히 눈치챌 수 있는 속도로 서서히 변화를 보였다. 새로운 잎은 나오지도 않는데 잎은 하나 둘 끝이 타들어갔다. 싱싱함은 온데간데없고 생명력을 잃어가는 모습에 조바심이 났다. 찾아보니 과습을 주의하여야 하는데 공중 습도가 높아야 하는 식물이라고 한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식물이 다 있나!
지금은 어엿한 2년이 넘어가는 식집사인지라 이런 류의 식물 기르기 설명이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 마치 "손님, 이 머리는 고데기로만 나올 수 있어요."라는 미용실 원장님의 말처럼, 흔하디 흔한 까방권 전문 멘트로 여겨지지만 그때의 나는 식물 기르기의 초보였으므로 덜컹하는 마음과 함께 혼란감이 들었다.
이를 어쩌나.
그렇다. 나는 이 생명체의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는 알아보지도 않고 덜컥 내 소유로 만든 것이다.
우선 물은 아껴주기로 하였다. 일명 말려 키우기다. 과습을 주의하라는 주문은 쉽게 들어줄 수 있었다. 사실 지금에서야 쉽게 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식물을 본격적으로 기르기 전에 초록별로 보낸 식물들은 과습으로 보낸 것이 반 이상은 족히 될 것이다. 무언가를 덜하고 아무것도 안 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분명히 문제가 있어 보이는데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처럼 무력한 일은 없다.
다행히 나에게는 아직 공중 습도라는 문제를 해결해야 할 의무가 남아있었다. 물 주기로부터 시선을 돌려 다른 무엇에라도 몰두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처음에는 수시로 공중 분무를 하는 것으로 대처했지만 그리 나아지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검색해보니 온실을 마련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식 집사를 자처하느라 이미 식물, 토분, 흙, 영양제를 하루가 멀더하고 사들이는 나에게 온실을 구입한다는 것은 거대하고도 부담스러운 무게로 다가왔다. 그래서 온실 비슷한 것을 구현하고자 애를 썼다. 분리수거하려고 내놓았던 얇은 플라스틱 통을 가지고 왔다. 식물에 칙칙 분무를 하고 통의 안쪽 표면에도 분무를 한 뒤 식물에 살포시 뒤집어 씌웠다. 식물도 숨은 쉬어야 할 것 같아서 바닥으로부터 통을 살짝 띄워 틈을 주었고, 중간중간 아예 열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래도 아무 작업을 하지 않았을 때보다 유의미한 효과를 보이는 듯싶었다.
식물의 잎이 손상되는 속도가 어느 정도 더뎌진 것처럼 보였고, 무엇보다 식물의 가운데 쪽에 담배를 돌돌만 것처럼 반가운 신엽을 보이기도 했다. 신엽을 발견한 날은 그다음부터 언제나 저 잎이 활짝 펼까 설렘으로 다음날 아침마다 녀석에게 문안 인사하기 바빴다. 신엽은 역시 이름처럼 아기였다. 얇고 여리고 싱싱한 잎. 이 잎도 햇살을 받고 시간의 흐름을 먹고 나면 더 진하고 두터운 잎이 되겠지. 간이 온실의 미약하지만 유의미한 효과를 본 뒤에 다른 비실거리는 식물에게까지 비닐봉지를 이용한 온실효과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작업은 상당히 귀찮고 무엇보다 볼썽사나웠다. 기껏 예쁜 식물을 즐기고 싶어서 집에 데리고 왔는데 내가 감상하는 것은 비닐봉지 언덕들이라니! 그리고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주체하지 못할 풍성한 식물을 볼 수 없었고, 근근이 생명을 유지하는 정도였으니 나의 간이 온실에 대한 열정은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더디긴 하지만 기존의 잎이 말라갈 때쯤 신엽이 돌돌 말려 생명을 유지할 준비를 해주었기에, 어차피 풍성하게 자라기는 틀린 녀석이니 이렇게 근근이 키워내면 되지 생각이 자리 잡았다. 그렇게 잊혔다. 흙이 바싹 말랐을 때쯤 물을 주고, 어쩌다 신엽을 보면 반가워하고 또 잊고의 반복이었다. 과습을 주의하라는 말은 철저히 지켰고, 공중 습도를 좋아한다는 말은 나 편한 대로 잊고 살았다.
그러다가 이제 남은 잎이 달랑 두 장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끊임없이 신엽을 내주었던 시절 그러니까 잎이 몇 장 더 있었던 시절에는 과감히 잘라내 었을만한 상태의 누런 잎이다. 이미 생명을 다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런데 자세히 두 줄기 사이에 뾰족한 무언가가 보인다. 신엽을 내려나보다. 나는 또 안심하였다. 이 한 잎이 생명을 이어 나가주겠지 하고.. 그러다 이제쯤 신엽이 돌 돌말 릴 때가 되었는데? 하고 오래간만에 들여다보니 세상에! 그 자리에는 말라비틀어진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이것 큰일 났다 싶었다. 새 희망은 없어졌고 이젠 이 갈색의 타들어간 잎 두 장뿐. 가만 보니 달랑 두 장 잎의 끝에서 시작된 갈색의 빛이 줄기를 타고 내려갈 듯하였다. 줄기까지 모두 갈변하고 나면. 그렇다. 끝장이다.
그러다 어제의 나는 무슨 방법이라도 간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는 식물 몇몇 개의 사진을 이리저리 찍어보았다. 싱싱하고 예쁜 식물의 사진만 올리던 인스타에 초라한 사진들을 올리고 쓴 첫 문장은 “우리 아이를 살려주세요.”
물론 아이들 중에서 가장 심각한 녀석은 칼라데아 오르비폴리아였다.
자랑처럼 올렸던 다른 식물들과 달리 아픈 식물들의 모습은 나의 실패와 게으름의 증거처럼 여겨져 애써 외면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이 아이들 사진을 찍은 일이 최근에 없었으며, 도와주세요라는 명목으로 사진을 올림에도 가장 못난이 오르비 폴리아를 마지막 장에 배치하였다.
사진을 찍다 보니 무언가가 보였다. 원줄기 바깥쪽으로 흙을 뚫고 나온, 작은 뿔 모양의 촉이었다. 자세히 보니 하나가 아니었다. 둘이었다.
여태 신엽은 줄기와 줄기 사이에 돌돌 말린 잎으로 보여주었던 터라 오랜 시간 함께 했음에도 이런 촉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나의 시선은 늘 줄기와 줄기 사이에 고정되어있었고 신엽이 없다면 실망하여 이내 시선을 거두어 왔던 것이다.
두 개의 촉을 발견하여 기쁜 마음에 카메라의 초점을 이리저리 잡으려 애쓰는 동안 보인 것이 있었다. 무수히 잘려나갔던 갈색 줄기의 마른 흔적들. 그 흔적을 보는 순간 울렁하고 가슴께에 무언가가 몰려왔다. 목이 잠기고 갑갑해졌다. 내가 본 것은 잘려나간, 말라갔던 줄기의 수만큼 오르비폴리아가 견뎌왔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