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더 잘 안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를 타인을 통해 듣는 것은 매우 생경한 느낌이었다. 한국인 엄마와 미국인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저자 미셀 자우너의 한국 음식에 대한 묘사가 그러했다. 동그란 뻥튀기, 손가락에 끼워먹는 과자, 치킨무 등의 음식들은 그녀의 문장에 담기는 순간 입체적으로 변하였다. 나에게 너무나 당연해서 상세히 묘사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것들이 저자에겐 이야깃거리였기에 내가 보지 않았던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작가는 가지고 있었다. 책을 읽는 내내 한국인인 나는 우리의 음식 묘사를 이해하고 상상할 수 있는데, 이 책을 읽을 외국인들은 어떻게 그리며 읽을지 궁금했다. 도저히 내가 알 수 없는 부분이겠지. 한국에서 1년 정도 생활했던 미국인 친구가 둘 있는데 이들에게 이 책을 소개할까 말까 망설여진다.
책은 작가의 어린 시절부터 암으로 투병하는 엄마를 간호하는 과정 그리고 엄마를 떠나보낸 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책을 읽으니 생각나는 책이 있다. 신혼여행을 갈 때 읽을 책을 미처 준비하지 못했다. 공항에서 골라 집은 책이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였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매우 좋은 선택이면서 매우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 엄마 곁을 떠나게 되는 나로서는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을 다하여 이 책을 읽을 수 있었고, 감정이 복받쳐 따스한 바닷바람 아래서 비키니를 입은 채 눈물을 연신 흘리며 책을 읽었다. 그때 나는 그저 딸의 입장에서만 읽으면 될 일이었다. 충분히 딸인 나와 나의 엄마만을 생각하고 그 자리에 놓아가며 읽었다.
이제 나는 딸인 동시에 엄마가 되었다. 이 혼재된 역할 속에서 <h마트에서 울다>를 읽는 것은 훨씬 심적으로 버거웠다. 문장이 읽히지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힘들었다는 이야기이다. 어떤 문장은 딸의 입장에서, 어떤 문장은 엄마의 입장에서 읽었다. 그것은 내가 의식해서 되는 것은 아니었고 문장에 따라 저절로 제 나름대로 방향을 잡고 흘러갔다.
그녀의 말처럼 ‘무슨 일이든 어찌어찌 잘 풀릴 거라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도 우리 엄마’였으나 나는 의도적으로 딸의 입장에서 읽기를 피한 것 같았다. 내가 떠나갈 엄마의 입장이 되는 시기보다 엄마를 떠나보내야 하는 딸의 입장이 되는 시기가 더 가깝게 느껴져서다. 두려웠고 엄마를 떠나보낼 생각을 미리 하고 싶지 않아 애써 외면하며 읽었다.
나의 어떤 부분은 작가의 엄마를 닮았고, 어떤 부분은 작가를 닮았다. 책에서 마미맘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자식이 다쳤을 때 괜찮냐고 얼른 품어주는 엄마, 아이가 작품을 만들어왔을 때 반가워하며 한껏 치켜세우는 엄마가 마미맘이라 한다. 작가의 엄마는 마미맘이 아니라고 했다. 일례로 작가가 큰 상처를 입어 피를 흘리며 다친 적이 있었는데 아파서 기어가는 자신을 두고 엄마는 큰 소리를 내며 화를 냈다고 했다. 나도 그 엄마와 같았다. 2년 전 아이가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서 앞니가 깨지고 얼굴은 까지고 피가 난 채로 서서 울고 있던 저녁이 떠오른다. 나는 아이를 보는 순간 소리를 질렀고 사위는 어둑해져서 깨진 이는 찾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화가 많이 났다. 사고는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아이가 일부러 그런 일도 아닌데, 무엇보다 아픈 것은 아이인데 앞니가 깨져나가 어두운 동굴처럼 보이는 아이의 입속을 보니 속이 타고 마음이 아려 자꾸 화가 났다. 추후에 그랬던 내가 밉고 그 저녁만 생각하면 명치 아랫부분이 타는 느낌이 들곤 하는데 이 책을 보며 그때의 내가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작가의 엄마가 자신을 동일시하고 일부로 생각하였다는 표현이 있었는데 나 또한 아이의 깨진 이를 찾으면서 마음속으로 아이의 미래로 달려 나가고 있었다. 단 몇 분 전에 일이 없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며 과거로 시간을 놓아두고 싶었고, 앞니가 없는 내 아이의 미래가 내 몫인 양 아렸었다.
엄마는 나도 언젠가 그런 상처를 갖게 될까 봐 두려움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후회할지도 모르는 모든 것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일이 엄마의 임무가 되었을 것이다.
카메라 렌즈 뒤에는 어김없이 엄마가 있었다는 걸 알았다. 나를 나의 단순한 즐거움을. 내 안의 세계를 포착해 보존하려던 엄마가
아이의 상처를 두려워하는 동일시하는 미숙한 엄마가 나이고, 아이의 순간을 보존하겠다는 막중한 책임감에 사로잡힐 때가 있는 것도 나이다. 작가는 엄마가 되어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이렇게나 엄마의 마음을 잘 알 수 있을까. 그녀가 보는 엄마의 모습에서 나를 발견하곤 했다.
다만 나는 작가의 엄마처럼 요리를 좋아하지 않고 잘하지도 못한다. 오히려 이 부분은 딸 쪽에 가깝다. 요리를 잘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 여기에 마늘 넣어야 해? 얼마큼 넣어야 해?”하고 묻는 쪽이다. 그러니 책을 읽는 내내 딸이 되기도 하고 엄마가 되기도 하느라 고생스러웠던 것이다. 두 여자를 관찰하며 나의 닮은 부분까지 찾아내느라.
다행으로 생각한 것은 엄마가 내 곁에 있을 때 이 책을 읽었다는 점이다. 엄마를 떠나보낸 뒤라면 이 책을 도저히 읽지 못했을 것 같다. 엄마가 곁에 있는 지금도 상상하기를 거부하며 읽었는데.
대신 조금 편안한 쪽을 선택하며 나의 딸들이 그릴 나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어른이 된 내 딸들은 “우리 엄마는..”하며 나를 어떤 엄마로 추억할까? 내가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면 어느새 곁에 와서 ‘우와, 잘 그린다!’라고 말하며 제 종이에도 끼적이는 아이들이니까 이런 모습은 기억해줄 것 같다. 책을 읽는 모습도 기억해줄 것 같고, 이것저것 사부작대며 만들고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모습도 기억해줄 것 같다. 다만 자신 없는 부분은 역시 마미맘답지 않은 모습이다. 조금 더 마미맘답게 되어 더 따스한 엄마로 기억되고 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