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글방 12기 프란시스의 글
그 집은 우리에게 많이 특별했다. 내가 두 돌이 되었을 때 이사 왔다던 오래된 주공아파트가 재건축되고 생긴, 크고 좋은 브랜드 아파트였기 때문이다. 스무살 겨울에 들어간 그 집에서 나는 처음으로 침대와 책상이 있는 방다운 방을 가졌다. 처음으로 내가 원하는 대로 책꽂이를 세웠고, 벽에 사진도 붙이고, 옷장에 잡동사니도 몰래 감춰 두고 그랬다. 그 집은 화장실도 두 개였고, 부엌도 엄청나게 넓었다. 부모님도 역시 처음으로 침대를 썼다. 엄마는 사람들을 초대하고 몇 번이고 집들이를 했다. 엄마의 고생을 다 아는 고모할머니가 엄마를 엄청 축하해줬던 기억이 난다. 새 아파트, 첫 입주... 쓰자면 한도 끝도 없이 쓸 수 있는 많은 의미가 그 집에 있었다.
사실 우리는 그 집에 들어가기 전까지 몇 가지 고생을 좀 했다. 아파트가 하루아침에 재건축 되겠나. 일단 너무 오래 기다렸다. 재건축 소리가 들리고 나서 시공에 들어가기까지 거의 5년 정도 걸렸고, (이쯤 되니 그 주공아파트에 곰팡이도 심하고 바퀴벌레가 너무 많아져서 난 하루빨리 이사 나가기만을 바랐다.) 거주민들이 모두 이사를 한 후 공사를 시작하고 완공되기까지도 3년이나 걸렸다. 거의 8년을 기다린 것이다.
특히 공사기간 3년 동안이 좀 힘들었다. (심지어 이때는 나의 예민성이 극에 달했던 고등학교 3년의 시절이었다.)
우리는 아파트가 지어지는동안 근처 주택가에 있는 어떤 집에 전세로 들어가게 됐는데, 잠시 살 집이라 부모님이 싼 집을 얻는 바람에 말이 1층이지 반지하나 다름 없는 집으로 들어간 것이다. 부모님이 돈이 없었던 게 사실이라서 거기까진 불만이 없었는데, 담벼락도 허술하고 대문도 늘 열려 있던 그 집에 사는동안 아끼던 자전거며 신발을 몇 번이나 도둑맞았다. (집 밖에 신발을 벗고 들어오는 주택이었다.) 어느 날은 윗집 화장실이 새서, 자는 와중에 똑똑 떨어지는 오물을 맞은 적도 있었다. 몇 일을 참다가 문제를 제기 했더니, 집주인은 우리 탓을 했다. 자식들 뻔히 보는 앞에서 우리 부모를 세입자라고 무시했다. 물론 부모님도 참지 않았기 때문에, 순식간에 경찰을 불러야 하나 고민될 만큼 살벌한 싸움이 벌어졌다. 근처에 살던, 얼굴이 매우 검고 수염이 덥수룩한 이모부가 공사장 작업복을 입고 나타나자, 겁에 질린 집주인은 갑질을 멈췄다.
결국 이 일 때문에 끝까지 다 못살고 중간에 이사를 한 번 했다. 다행히 새로 이사 간 곳은 집주인이 착해서 잠깐 참고 살 만했다. 그곳에서 나는 수능을 보고 대학도 입학했고, 그러는 동안에 아파트는 거의 다 지어져가고 있었다. 나는 어서 빨리 진짜 우리집인 새 아파트로 들어가기 만을 바라고 있었다.
아파트가 다 지어지고 드디어 입주가 시작됐다. 이사 날을 정할 즈음에, 엄마는 건너 건너 아는 사람으로부터 '구경하는 집' 인테리어를 제안 받으셨다. 인테리어를 싹 다 고치고 나서, 구경하는 집으로 한두 어달 두면 인테리어 비를 받지 않겠다는 뜻이었던 거 같다. 고민하다가 엄마는 그렇게 하기로 결정 하셨고, (이렇게 하면 나중에 집 값이 오른다고 한다.) 그 덕에 우리집 이사 날은 한번 더 뒤로 밀렸다.
이 무렵에 나랑 언니는 시간이 날 때마다 '우리집'을 '구경' 갔다. '구경하는 집' 이 되어 버리는 바람에 입주는 밀렸지만, 이미 우리집은 생겼다는 기쁨 때문에 하루하루 설렜던 것 같다. 우린 'OO 야 우리, 우리집 구경갈래?' 말하면서도 웃기다는 걸 알아서 더 자주 그 말을 했다. 번듯한 우리집이 생겼다는 것을 즐기면서. 서로 깔깔대면서. 이사 전에 그렇게 구경을 갔다. 기다림이 너무 길어져서 힘들었지만 그래도 여기까진 아름다웠는데...
인테리어 업자가 생각보다 장사가 잘 안됐는지, 뭐가 수가 틀렸는지, 이사 날이 다가오자 계속해서 이사를 더 미뤄 달라고 했다. 그리고 이제 와서 인테리어 비를 얼마만이라도 내놓으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또 어른들끼리 싸움이 났다. 듣자 하니 어느 날엔 그 인테리어 업자가 '남편 빼고 조용히 주차장으로 내려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누군가에게 하소연하는 엄마의 전화통화를 듣고 알게 된 이야기다. 나는 자연스럽게 '아 우리 엄마가 어떤 폭행을 당할 뻔 했다'고 추측 했고, 이 집에 대한 우여곡절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실제로 이사하는 날, 엄마는 눈물을 흘리시며, 집 안 곳곳에 고사떡을 올려놓고 굵은 소금을 뿌리셨다. 이 모든 과정이 머릿속에서 슬프고 과하게 각색 되었고 집의 의미는 더 진해졌다.
우리는 이 집에서 8년을 살았다. 죽을때까지 살고 싶다고 맨날 좋아서 호들갑을 떨었는데, 사실 알고 보니 빚을 많이 지고 들어간 집이었고, 융자 빚이 버거워져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왔던 것이다. 집을 내놨다는 이야기를 들을 무렵에 나는 하우스 푸어 라는 단어를 알게 됐다. 철모르게 '이 집이 어떤 집인데!' 라는 드라마 속 대사까지 엄마한테 부르짖어 봤으나 헛소용이었다. 어거지로 가는 이사라, 엄마는 비싸게 집을 팔고 싶어서 값을 높이 불러 놨놔보다. 그런데 집이 내내 안 팔렸고, 그거는 또 그거대로 문제였다. 결국 얼마에 타협을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28살가을에 이사를 나가게 됐다.
이 집에 사는 동안 갓 대학에 들어간 나는 졸업을 했고 사회인이 됐다. 언니가 결혼해서 새 가족이 생겼고, 강아지 한마리도 생겼다. 사진을 공부하고 벽에 못을 박아 사진도 걸었다. 행거의 옷들이 캐주얼에 정장으로 바뀌었다. 의미있는 집에서 어른이 되는 과정을 겪었던 것이다. 나는 (자칭) 사진가로서 무언가 해야 했다.
시집가서 나가 사는 언니와 형부를 불러들였다. '이사가기 전에 이 집에서 마지막으로 기념 사진을 찍어야 해.' 가족들에게 부탁 같은 거 해 본 적이 많지 않아서 기대를 안했다. '무슨 사진을 찍어~' 라는 핀잔이나 들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다들 사진을 찍는데 동의했다. 딱히 말은 안 해도 다들 어떤 의미인지 알았던 것 같다. 거실에 삼각대를 놓고 사진을 찍었다. 다들 어색해 하길래 내가 먼저 '잘 살다 갑니다~' 했다. 그러자 가족들이 조금 웃었다. 하나 둘 셋 ~ '잘 살다 갑니다~'
이게 그 사진이다. 한때 우리도 좋은 집에 살았다는 영광의 기념사진.
그 이후에 이사간 더 작고 더 낡은 아파트에서 우리 가족은 그때만큼 잘 살고 있다. 그러나 지금 집에서 다른 집으로 이사가는 날이 오더라도, 이런 기념사진은 굳이 찍지 않을 것만 같다.
*가족들의 초상권을 위해 사진은 블러처리함.
작가 프란시스 프로젝트
프란시스 하- 그 영화에서 따온 이름 맞습니다.
시간이 나면 사진촬영과 글쓰기를 연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