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글방 12기 수부의 글
김민희라고 쓴 후 검색 버튼을 눌렀어. NYT에서 선정한 '21세기 최고의 배우 배우 25인'에 그가 송강호와 함께 포함되었다는 기사를 읽은 직후였지. 한 인물을 둘러싼 복잡한 감정을 탁월하게 표현함으로써 김민희가 어떻게 영화에 기여했는지 말하는 글을 읽었는데 그게 마치 꿈인 것 같아. 검색에 걸려든 다른 기사들은 몇 년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채 흘러온 현실이었어.
"커리어 하이 찍던 시점에 남자 잘못 만나 불륜녀가 된 건 팩트죠. 이런 관계는 끝내 순탄치 않게 끝나던데 부디 파멸에 이르렀으면 좋겠네요." "거쳐간 남자들도 다 A급이고 연기도 어마어마한 레벨인데 늙다리 감독 만나서 끝났죠."
이런 말들이 김민희에 대한 세간의 평가라고 해. 그가 틀렸고 잘못했고 망쳐버렸으니 우리의 외면은 불가피하다고 말해. 나도 결국은 외면한 사람이야. 김민희를 외면할 이유를 찾는 건 너무 간단했고 그의 편에 서기엔 모든 게 지나치게 복잡해 보였거든.
2016년 7월 13일 조선일보에는 “중년 50% 홍상수 이해해요.. 배우자만 모른다면 삶의 활력소”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어. 김민희와 홍상수의 연애가 알려진 직후에 나온 비겁한 기사들 사이에서 이 글은 마치 세상이 감춘 속내를 드러내 보겠다고, 정말 너희가 이 커플을 욕할 수 있냐고 말하고 싶기도 했겠지.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남성의 시선으로 작성된 기사에서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된 젊고 유능하고 주체적인 여자는 없었어. 그가 한 것은 선택이 아니라 실수이고 그는 '배우자는 몰라'야 했던 '활력'의 도구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었을테니까. 외면의 자리에선 김민희가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았어.
지난가을에 있었던 국내 한 시상식에서는 그가 출연하고 홍상수 감독이 연출한 영화 《도망친 여자 》가 상을 받았어. "페르소나의 교체로 인해 감독은 여성에 대한 환상적인 느낌을 가졌던 분위기들이 리얼함으로 바뀌는 계기가 됐다" 이 비문이 기사에 나온 심사평이야. 김민희는 감독에게 영감을 주거나 작가의 세계를 대변하는 페르소나로 위치해. 왜 배우 김민희가 여성의 어떤 면을 리얼하게 드러냈다고 말하지 않을까? 주어는 언제까지 홍상수일까? 왜 김민희를 김민희라고 부르지 않지? 그건 김민희라는 배우가 그의 영화를 바꿨다는 사실을 은폐하는 일이야. 김민희라는 배우가 찾은 자신의 역할을 축소하는 일이야. 김민희를 이해해요. 그렇게 말하는 시선을 찾아 검색하는 일은 며칠째 실패하고 있어.
사랑이 약속이라 믿는 사람들이 그걸 어긴 이에게 죄를 묻는 것일지도 모르지. 약속을 지킨다는 건 정말로 귀한 일이잖아. 하지만 모든 약속에 완벽하게 헌신하고 거스르지 않는 이가 있을까? 왜 더 쉽게 폐기되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약속들에 대해서는 침묵할까? 그렇다면 사랑에는 약속 말고 또 무엇이 있을까? 나는 사랑을 구성하는 다른 말들 가운데서 그를 찾아내는 중이야. 그의 사랑.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자신이 상처 받을 수 있다는 걸 직감했을 테지만, 그마저 무릅쓰고 책임지겠다고 다짐하게 했을 사랑말이야. 그게 비록 이해하기보다 외면하기 쉬운 사랑일지라도, 외면하기 위해 존재하는 수많은 이유들 사이에서 한 번쯤 시도해볼 수 있을까.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을, 김민희라는 세계를 발견하려는 시도 말이야.
드디어 빛을 보게 된 배우로서의 명성을 대신해 비난받는 사랑을 택한 자는 어리석은 걸까, 용감한 걸까? 유난히 가혹한 잣대가 많은 유능한 여자들을 평가절하해온 방식이고, 그게 그에게도 반복되고 있는 거라면?
나는 언젠가 일과 사랑 중에 하나를 택하라면 무엇을 고르겠냐는 질문을 받았어. 그때의 나는 여초 업계라고는 하지만 주요 업무는 남자들이 차지한 공연계에서 일하는 사회초년생이었고 질문을 한 사람은 그 주요 업무 중 하나를 하는 친절한 남자였지. 지방 투어가 시작된 대구에서 극장 셋업을 마치고 시작된 술자리였고 나는 이게 왠 싱거운 질문인가 생각하며 당연히 사랑이라고 답했어. 그건 프로답지 않다거나 역시 감성적이구나 하는 그들의 반응에 악의는 없었지. 하지만 질문이 틀렸잖아. 둘 중의 하나만 고르는 거 이상해. 무엇보다 사랑이 우선이면 아마추어야?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기분은 실제였겠지만 그냥 기분 탓으로 돌리기로 했던 초겨울의 막창 골목은 시끄러웠고 좁았지. 일과 사랑 중에 김민희는 하나를 골라야 할까? 김민희가 배우로서 구현한 세밀한 세계는 그런 좁은 골목에 주저앉은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테지.
나는 그의 세계가 평범한 이들이 기획한 대로 꾸며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애초에 예감하고 있었을지도 몰라. 내 용돈이 키키나 신디더퍼키, 쎄씨 같은 잡지를 사느라 늘 모자랐을 때, 김민희는 그 모든 잡지 속에 매번 다른 모습으로 있었어. 마른 몸에도 힘이 느껴지는 묘한 눈빛, 브래지어를 하지 않고 그물 같은 뜨개옷을 걸치고 찍은 커버 사진, 유행하는 침구 대신 동대문에서 직접 사 온 붉은색 벨벳 원단으로 꾸민 그의 침대, 귀엽고 컬러풀한 양말을 수집한 바구니를 보여주며 그걸 골라 신는 거로 기분 전환을 한다는 인터뷰 같은 것들. 아직 고등학생인데 어떻게 저렇게 뚜렷할 수 있지? 자신의 취향을 스스로 구성하고 연출하는 예술가로서의 기운을 느꼈던 것 같아. 김민희 스크랩북은 계속 두꺼워졌고, 그는 계속 그만의 유일한 세계를 건설했지.
왜 더 도덕적이어야 하는 이들의 변명에 귀 기울이면서 김민희가 세우는 세계를 배경 취급할까? 윤리적 판단과 예술적 판단 사이의 잣대는 원래 아슬아슬했던 거 같은데, 어째서 배우인 김민희에 대한 판단은 자꾸만 유보되지? 나는 이제 조금 오해할 정도로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그의 세계를 더 구체적인 언어로 이야기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욕하지 않는 것만으로, 마음으로 응원한다는 것만으로는 힘이 되지 않는다는 걸 중요한 젊은 여자들을 잃어가며 배웠으니까. 배우가 된 그는 한동안 발음도 이상하고 연기도 어설프다며 그냥 다시 모델이나 하라는 소리를 들었어. 한 토크쇼 출연 이후에는 백치미인지 말도 잘 못 한다고 욕을 먹었어. 하지만 끝까지 연기를 관두지도 않고 다른 배우를 따라 하지도 않고 자기 자신을 지켜내는 방식으로 그걸 잊게 했지. 그는 《아가씨》와 《화차》, 《밤의 해변에서 혼자》 같은 영화 속에서 여전히 김민희이면서도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던 배우야. 고등학생 모델이었을 때부터 표현하기 힘든 무언가를 담아냈던 표정이나 태도를 잊지도 포기하지도 않고도 성공했지. 세계 3대 영화제 가운데 하나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는 말 외에도 그의 세계를 배경이나 소품 정도로 남겨둘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해야 해.
그는 뻔뻔하게 불륜을 공개했다는 비난 속에서, 예술이 뭔지 몰라도 가정을 파탄 내도 되는 건 아니라는 판단 속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할지도 몰라. 어쩌면 가장 확실한 전망이지. 누군가는 나에게도 묻겠지, 네 남편이 김민희 같은 년이랑 바람나도 그렇게 말할 수 있겠냐고. 그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쉽게 성공했다면 이 글을 시작하지도 않았을 거야. 나라면? 밤을 새워 울고 다시 원망의 욕을 쏟아내며 복수의 칼을 갈겠지. 그러니 다시 묻겠지, 너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무엇을 옹호하는 거냐고. 하지만 이해할 수 없다고 존재해서도 안 되는 걸까?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발견했을 때 우리가 할 일은 그저 외면 뿐일까?
나는 요즘 SF소설을 읽어. 너무 허무맹랑해서 현실을 살아가는데 전혀 쓸모없는 이야기라고 여겼던 게 불과 얼마 전인데, 그 이상한 세계의 의미를 알아버렸어. 그건 지금의 세계를 뒤집거나 아주 아주 멀리까지 다녀와야 보이는 것에 관한 이야기들이었거든. 만약 잠시 떠나간 곳에서 그 존재조차 몰랐던 어떤 세계를 겨우 발견할 수 있다면 그건 하나의 신호일 거야.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더는 외면하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확신하거나 단죄하는 것 말고도 다른 언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신호. 나도 너에게 네가 본 것에 관해 이야기해달라고 조를 수 있을까?
작가 수부
되도록 더 다정해지는 방법으로 글쓰기를 택했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