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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마글방 Apr 29. 2020

코로나 시대의 장녀

4월 하마글방 수강생 보윤의 글

집에 돌아왔다. 예전처럼 2주일쯤 보내다 올라가겠거니 했는데, 벌써 두 달이 다 되어간다. 코로나로 가족의 일상은 처음 겪어보는 형태의 것이 되었다. 개학을 목 빠지게 기다리던 중학생 동생은 왁자지껄한 교실 대신 컴퓨터 채팅방에서 친구들을 만난다. 매일 아침 절에 가서 음식을 만들고, 불경을 공부하던 엄마의 종교 생활도 그대로 멈췄다. 밤과 낮,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회사에 나가는 아빠의 일상만 그대로다. 아빠를 제외한 온 가족이 하루 24시간을 붙어서 지내니 막내 강아지 콩이는 살판이 났다. 


모두에게는 각자 캐릭터가 있다. 그중 나는 철부지다. 장녀라 하면 듬직함, 인내심, 희생정신 등을 떠올릴지도 모르겠으나, 이 집의 장녀는 철부지가 되기를 자원했다. 어릴 때부터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동생의 아이다움을 되살리기 위해서, 갱년기에 접어든 엄마와 아빠를 웃음 짓게 하기 위해서. 집에만 오면 중학생 시절 반에 하나씩 있는 엉성하고 웃긴 아이로 돌아간다.


나와 달리 동생은 거대한 고래들 옆에서 몰래 숨어있는 새우다. 10년 전 동생은 분명 세상 어디에도 없던 밉상스러운 꾸러기였다. 하지만 일곱 살이 지나면서 명확히 집어낼 수 없는 이유로 눈치 보는 새우가 됐다. 본인은 소심하지 않다고 빠닥빠닥 우기지만, 기 센 가족 사이에서 조그만 게 기가 팍 죽은 걸 보면 마음이 애린다. 그래서 동생 앞에서는 이미 알고 있어도 모른 척을 한다. 그럼 그는 “언니, 이것도 몰라?”라고 하며 금세 으스대기를 좋아하는 어린애가 된다. 


아빠는 마도로스를 꿈꾸는 워커홀릭이다. 수십 년 전 사진 속 아빠는 바다를 누비고 있지만, 내가 태어난 후 그는 모든 걸 미뤘다. 10년 후에는 동생이 태어나며 그의 꿈은 계속해서 미뤄지고 있다. 코로나 사태까지 겹치며 아빠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매일 밤 소파에 누워 한숨 쉬는 아빠 옆 좁은 자리를 비집고 들어간다. 아빠는 나이가 몇이냐 징그럽다고 인상을 찡그리지만, 새어 나오는 웃음은 감추지 못한다. 


코로나로 절에 가지 못하는 엄마는 최근 미스터트롯으로 새로운 삶의 낙을 찾았다. 이제는 유명한 트로트 가수가 된 이들의 어린 시절, 무명 시절 이야기를 들으며 울다 웃다 한다. 엄마는 본방은 물론이고, 재방에 삼방까지 놓치지 않고, 식탁 위에서는 언제나 유튜브가 함께한다. 나는 영 꽝인 노래 실력으로 아리아리아리 동동, 스리스리스리 동동 열창하며 엄마의 낙에 동참한다. 그럼 엄마는 나와 함께 씰룩씰룩 몸을 움직이며 다시 한번 감동적인 트로트 가수들의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나는 꽤 성실히 철부지 역할을 수행한다. 집으로 온 첫날, 엄마가 물었다. 


“그때 먹던 약은 안 먹어?”


처음 약을 먹는다고 술김에 고백해버렸을 때, 안 물려줘도 될 걸 물려줘서 미안하다며 울던 엄마가 기억났다.


“아, 이제 안 먹어도 된대.”


애인과 담배를 숨기는 것처럼 뻔뻔하게 거짓말을 했다. 그렇게 조금 더 완벽한 철부지가 됐다. 


서울에 있을 때 의지로 뿌리칠 수 없는 우울이 찾아오면 애인의 품에 안겨 마음을 털어놓거나, 담배를 피우며 시간을 죽였다. 그것도 아니라면 세상을 잃은 사람처럼 침대에 누워 온종일 우는 것으로 속을 풀었다. 종종 집에 왔을 때도 몇 주만 있다 서울로 돌아가야 했으니 별달리 힘들 것은 없었다. 부산에서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는 요즘, 어쩔 수 없이 철부지의 시간과 우울의 시간이 겹칠 때가 생긴다. 하지만 여기는 껴안아 줄 애인도, 태워 없앨 담배도, 꺽꺽 소리 내 울 수 있는 방도 없다.


대신 꼬여버린 마음을 푸는 것은 모두가 곤히 잠든 새벽이다. 낮에는 막아 놓았던 우울의 입을 풀고, 그가 하는 말을 듣는다. 물소리에도 잘 깨지 않는 엄마 옆에 누워 가만히 운다. 다릉다릉 신기한 소리로 코를 고는 콩이를 안고 운다. 엄마와 아빠와 동생에게는 아마도 평생 말하지 못할 이야기를 속삭이면, 인간보다 빨리 뛰는 심장을 가진 콩이는 5kg짜리 작은 몸뚱아리를 기대 온기를 전한다. 콩이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오늘 새벽의 비밀은 잘 지켜줄게, 언니.’


아침이 밝으면 콩이만 알고 있는 둘만의 비밀을 덮어두고, 다시금 마음을 깨운다. 지금이 아니라면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가족과의 오랜 시간을 만끽하기 위해서,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이들의 웃음을 눈에 담기 위해서. 그렇게 매일 단단해진 마음으로 철부지 장녀의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



작가 보윤

한 존재는 하나의 우주라는 말을 믿습니다. 우주들의 만남을 꿈꾸며 글을 씁니다. 조금 덜 이기적인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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