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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마글방 May 15. 2020

비극의 예언을 내려주세요

4월 하마글방 수강생 리니어의 글

"3번 뽑으신 분들은, 이번 5월 한달은 도전과 압박감, 부담감을 느낄 수 있는 상황이 많이 벌어져요. 해야 할 것도 많고 신경 쓰일 것도 많아서 생각보다 스트레스가 많이 쌓일 수 있는 모습이거든요. 어느 한곳에 묶여있고 자유롭지가 않기 때문에 이달 초에는 괜히 일을 더 늘인다거나 행동반경을 넓히지 않고 개인에게 집중하는 게 좋을 것으로 보여져요. 직장인이신 분들, 또 공부하시는 분들은 이달 초까지는 스트레스로 인해 효율이 떨어지는 모습이 보여지기 때문에 조금은 릴랙스하실 필요가 있거든요? 긴장을 풀고 혼자만의 공간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다시 한번 점검해 보시는 게 좋은 모습이에요. 보시면 여기 은둔자 카드가 나왔는데, 이 카드는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먼저 실력과 내공을 쌓아야 한다는 걸 뜻하거든요. 그러니 여러분은 아직 준비가 좀 더 필요한 모습이신거죠. 아직은 좀 부족하지만, 그래도 은둔자 카드는 한 분야를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덕후 기질이 있어서, 여러분들이 이렇게 준비해 나가시는 기간 동안에 제대로 집중력만 발휘하신다면 후반에는 내가 속한 분야에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유투브에 들어가 타로 채널의 아무 영상이나 트는 습관이 있다. 타로점을 진심으로 믿는 것도, 무언가 큰일을 앞두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대부분의 타로 영상이 조곤조곤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진행되고 내용도 물 흘러가듯 잔잔해서 자장가로 쓰기 적절할 뿐이다. 오랜 기간 불면증으로 고생하면서 잠 오는 데 도움이 된다는 요법은 꽤 다양하게 시도해봤는데, 알코올을 비롯한 화학 요법을 제하면 제법 효과가 괜찮은 축에 든다. 원래 타로점은 리더(reader)가 카드를 섞어서 테이블 위에 스프레드 하면 손님인 시커(seeker)가 그 중 몇 장을 뽑고 리더가 결과를 해석해주는 게 정석이지만, 유투브 영상에선 그렇게 진행할 수가 없으니 리더가 스프레드 후 직접 카드를 뽑아서 1번부터 5번까지 보기를 만들어 둔다. 그럼 영상을 보는 사람은 그 중 마음이 가는 번호를 골라서 번호에 해당하는 해설 영상으로 점프하는 식이다. 나는 대체로 별도의 번호 선택 없이 순차로 듣다가 까무룩 잠들어 몇 번 해설까지 들었는지 기억도 못하는 편인데, 웬일로 결과가 귀에 잘 들어오는 날엔 흐뭇한 기분으로 잠들기도 한다.


타로 영상을 ASMR 처럼 쓴다는 이야기를 주위에 하면 다들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해석 결과를 믿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묻는 타로점 마니아부터 아무리 실용적인 이유여도 그런 미신에 기대는 걸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고개를 젓는 이성의 수호자까지 관점도 다양하다. 나는 대개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성향에 맞춰 고개를 적당히 끄덕이는데, 그건 나 역시 두 의견 모두에 동의하여 양가감정을 가진채 타로 영상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믿지 않는 것 치곤 영상을 지나치게 열심히 챙겨보는 이유가 나 스스로도 모호하고, 모두에게 타로점의 매력을 설파하기엔 이공계가 꼭 지켜야 할 - 아무도 그런 건 정한 적 없지만 - 미신 불신의 원칙을 깬 것 같은 불편함이 남는다. 가끔 타로점에서 진짜로 위안을 얻는 내가 조금 부끄럽기도 한 건 덤이다.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저서 「불안」에서 현대인들이 공통으로 지니는 불안에 대해 '비극'을 해결책으로 제시한 바가 있다. 처음 읽을 땐 느닷없이 고대 그리스의 전통을 언급하는 게 생뚱맞게 느껴졌는데, 어느 밤 또 타로 영상을 보다 '이번 달은 일이 자주 꼬이고 잘 풀리지 않을 것 같다'는 해설을 듣다가 불현듯 그 의미를 이해했다. 실패를 오로지 내 패착으로 보는 시선이 벅차서 이 시선을 함께 견뎌줄 틀을 필요로 하는 거구나. 내가 어리석어서, 선택을 잘못 해서 생긴 일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이미 예견되었던' '비극'으로 보고 싶어하는 거구나. 모든 걸 내 탓으로 돌리는 게 너무 뼈아프니까.


어릴 적 TV 에서 다큐멘터리 '인생극장'을 방영할 때면 모친은 화면 속 사람들을 가리키며 너희도 공부 못하면 저렇게 되는 거라고 말하곤 했다. 윤리적으로 흠결이 있는 발언이라는 건 중학생 때도 알았지만 그 말이 전하는 진짜 메시지는 완전히 무시하지 못했다. 다큐멘터리의 주인공들은 정말로 힘들어 보였던데다 성적이 곧 앞으로의 인생을 결정한다는 건 학교와 학원가를 - 적어도 그 당시에는 - 지배한 진리였기 때문에. 더구나 나의 모친은 늘 나를 앉혀두고 자신의 실패담을 이야기하는 사람이었다. 자신도 한때는 빛이 났고 하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이었는데, 그놈의 하이틴 로맨스 소설에 빠져서 입시철을 날리는 바람에 좋은 대학을 못 갔다고. 그래서 이런 인생을 살게 된 거라고. 너는 절대 나처럼 실패하게 두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를 실패로 정체화하는 사람 앞에선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성공 안해도 괜찮으니까 친구들이랑 좀 놀면 안될까요, 이번에도 못 나오냐고 친구들이 섭섭해 하는데, 따위의 말도 당연히 꺼낼 수 없었다. 그랬다간 하등 도움 안되는 친구들을 왜 만나냐는 더 아픈 소리를 들을 게 뻔했으니까.


실패를 두려워 하도록 교육받은 덕인지 나는 여태까지 큰 실패 없이 살아왔다. 대입, 취직, 이직 등 인생의 터닝 포인트라고 할 만한 지점을 모두 순탄히 지나왔다. 커리어 패스만 나열하고 보면 해피엔딩 연극의 주인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막을 내리면 끝이 나는 연극과 달리 내 인생은 늘 현재진행형이라는 게 문제였다. 한창 취업 준비를 하던 시절, 처음으로 한 회사에서 합격 연락을 받고 기뻐하다가 '자식이 그 대학을 나와서 그런 직장을 들어갔다고 쪽팔리게 어떻게 얘기하냐'는 눈물 어린 고함을 들은 후에야 실감했다. 저 사람의 바람을 만족시켜 주기 위해선 매순간 해피엔딩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는구나. 내 인생의 끝이 언제 어떤 형태로 올지 모르는데. 앞으로 나는 어떤 사람이 될지, 세상은 또 어떤 세상이 될지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데.


내가 대학교에서 수학과를 택할 때만 해도 수학과가 전도유망하다 믿는 사람이 많았다. 그맘때 출간된 스캇 패터슨의 책 「퀀트」의 영향으로 수학을 잘하면 금융계를 갈 수 있다더라 하는 소문이 돈 게 컸다. 그런데 그 후 2년이 지나 전산학과로 부랴부랴 전과하니 모두가 샴페인을 터뜨렸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위기에서 막 빠져나온 재난영화 주인공처럼 대했다. 고작 2년 만에 성공의 기준이 바뀌다니 오싹한 일이었다. 더구나 뒤를 돌아보면 여긴 수렁이 맞고 넌 잘 빠져나간 거라고 자조하는 친구들이 있다. 내가 운좋게 잘 빠져나온 거라면, 그 다음 번에도 잘 빠져나올 수 있을까? 나는 언제까지 실패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까? 차라리 이쯤에서 누가 토르의 망치로 실패 한 방 힘차게 때려주면 마음은 편할텐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토르는 소식이 없고, 덕분에 나는 계속 도망을 친다. 그 결과 실패는 점점 더 실체를 알 수 없는 공포의 집합이 되어간다.


아직도 선택이 무섭다. 영원히 이 틀 안에 있을 순 없단 걸 알기에 한발짝씩 내딛어 보지만, 나의 실패에 질책이 아닌 위로와 유머를 선사해줄 우군이 필요하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타로 마스터의 온라인 리딩. 운명에서 벗어나려 애쓰지만 끝내 비극을 맞이하는 온갖 희곡들이 나에게 힘이 된다. 보통은 책의 내용을 풀어낸 강의[1]에서 햄릿을 언급하며 '그는 실패(lose)했지만 아무도 그를 실패자(loser)로 부르지는 않는다'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우리도 언젠간 맞이할 실패의 순간에, 우린 실패자가 아니라 어찌할 수 없는 굴레에 빠진 거라고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부디 그 정도의 변명과 온정은 허락되었으면.


[1] https://www.ted.com/talks/alain_de_botton_a_kinder_gentler_philosophy_of_success



작가 리니어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서브컬처와 장르문학을 좋아합니다. 여성을 비롯한 비주류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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