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오는 날은 녹음이 짙어지고 마음 한편이 젖어 물렁해진다.
호주에선 비가 깨끗해서 비 오는 날이면 첫눈 내리는 날처럼 나가서 가만히 맞는 날이 많았는데 서울은 사연 있는 사람 같아 보일까 봐 못하는 게 아쉽다.
15살 때 친구들과 남산을 처음 올라갔다, 그날은 유달리 볕이 강했지만 올라가는 도중 갑자기 비가 내리 쏟아졌다. 우산이 없던 친구들과 나는 바지 양 끝을 걷어올린 채 무작정 가던 길을 올라갔던 기억이 있다.
눈잔등에 비가 고일 정도로 쏟아졌지만 축축한 흙냄새와 정상을 향해 정신없이 뛰어가던 기억은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진한 잔상으로 남아있다.
지금도 생각이 많아 머리가 한쪽으로 무거워지면 잠잘 때 빗소리를 듣는다, 빗소리와 번개 치는 소리를 동시에 틀어 놓으면 집이라는 공간에 머무는 느낌보다 비가 쏟아지는 야외 단상에 누워있는 느낌이 든다.
여전히 공기와 온도는 똑같지만 비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덕분에 내방은 비 오는 서울 식물원 같아졌다.
회사에서 비 오는 날이면 "집에 어떻게 가지?"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는데 시간이 남는 요즘 비 오는 날이면 공원 벤치에 앉아 빗소리를 듣는다. 앉아 있다 보면 고요히 혹은 잠잠히 마음 한편이 젖어 말랑해지는 기분이라 요 근래 비 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지금 나는 다소 메말라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그저 그런 온도에서 '고도를 기다리며'처럼
어느순간 마음에도 적당한 비가 내리길 기다리며 무언가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