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그때 찍은 빛바랜 컬러 사진 두 장, 마당 있는 집에서 나 혼자 서서 찍은 것과 그 주변에서 어머니와 함께 한 것.
누가 어떻게 찍어 준 것인지 알 길은 없지만 (어머니께 여쭤봤더니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신다.) 소중한 그때 그 순간을 이렇게 남겨주신 그분께 지금이라도 감사한 마음 전하고 싶다.
이정림 선생의 <사직동 그 집>은 이런 추억들을 읽는 내내 다양하게 소환해 준다. 평범한 일상을 비범하게 승화시킨 수필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 책 읽다가 날것 그대로 쓰다
<당신의 의자>(2011) - 집안 곳곳에 있는 빈 의자들을 보고 누군가 거기에 앉혀놓고 밤 깊도록 대화하고 싶다는 선생. 그 첫 손님으로 세 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를 초대하고 있다. 빈 의자가 아버지와 선생을 이어주는 매개체로 사용되고 있다. 이렇게 사물을 보면서 누군가를 떠올린다는 것. 이것이 평범을 비범하게 만드는 작가의 필력이다.
<크리스마스이브>(2010) - 일반적인 전개가 아니다. 큰 수술 후 6주간의 항암 치료. 그것도 매일매일. '바람보다 더 가슴을 시리게 한 것은 사실 외로움... 그러나 그 외로움이 놀랍게도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볼 수 있는 힘을 주었다... '(p16). 치료 마지막 날이 크리스마스이브였으니 그 감회가 얼마나 깊었을까?
<가만한 바람>(2008) - '바람이 잔잔히 부는 날, 강가에 서 있으면 바람과 물결이 서로 어깨를 치며 희롱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p27) - 지금 내가 앉아 있는 국립박물관 앞 공원 벤치에도 잔잔한 바람이 불고 있다. 여기서는 바람과 서로 어깨 치며 놀고 있는 것은 나뭇잎이다. 갑자기 이런 시선으로 보는 내가 새롭다. 가만한 바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에게 그렇게 큰 바람은 없었던 것 같다. 아니다. 다시 생각해 보니 몇 번 있었던 것 같다. 힘들어서 죽을 것 같았던. 한참 지난 후에 돌아보니 가만한 바람으로 여겨지는 것은 아닐까? 아무튼 앞으로 맞게 될 어떤 바람에도 너무 두려워하거나 움츠러들지 말자! 반드시 그것은 지나갈 것이고 그 이후에는 지금처럼 가만한 바람으로 보일 테니.
이 책은 선생이 발간 당시(2015)까지 41년 동안 써오신 4권의 수필집 중에서 33편을 힘들게 추려내어 실은 선집이다. 최근(2011)부터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편집이 특이하다. 그래서 점점 젊어지는 선생을 만나게 되면서 마지막에는 30대 초반의 젊은 작가 이정림을 만나게 된다. 선생의 수필 인생이 담긴 귀한 책이다.
- 헤리의 외면 일기
어느 곳 어느 시대에 처한 사람이든지 간에, 사람은 누구나 자기현시욕(自己顯示慾)에서 벗어나는 일이 쉽지 않다. 남보다 더 돋보이고 싶고, 남보다 더 인정받고 싶고, 남보다 더 추앙받고 싶은 욕심은 어쩌면 인간의 본능 중에서도 가장 원초적인 것에 속할지 모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날마다 욕심의 꼬리를 붙들고 이렇듯 바삐 뛰어다니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깊은 산중에 숨어 있는 나무처럼, 이 욕심이 난무하는 시대에서도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그리고 흔들림 없는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이 분명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다. 그라고 왜 세속적인 욕심이 없겠고, 그라고 왜 남보다 화려한 삶을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없겠는가. 다만 그에게는 그 욕심을 이겨낼 수 있는 정신력이 있었고, 속기(俗氣)를 버림으로써 명징(明徵)을 얻는 지혜를 터득했음이 다르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고고함을 고독으로 안고 사는 삶의 경지가 실은 얼마나 충만한 삶인가를 일찍이 깨달았던 명철함이 있었기 때문이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