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으면서 느낌표나 의문표를 주는 문장에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손글씨로 내 생각을 노트에 적어 보는 일.
그 순간에도, 그 이후에도 좋은 것 같다.
구불구불한 글들 속에 문맥으로 보지 않으면 나조차도 헷갈릴 정도의 난필이 간혹 있긴 하지만 그때 그 순간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구가 되어 주기에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지금 이효석 선생의 <메밀꽃 필 무렵>을 다 읽고 그간의 기록을 쭉 훑어보고 있다.
이것이 없었다면 '텅'빈 머릿속에서 나조차도 감흥 없는 글을 쥐어짜다가 말았을 것이다.
◆ 책 읽다가 날것 그대로 쓰다
얼만 전 <이효석 문학상 수상 작품집 2023>을 읽은 적이 있는데, 정작 이효석 선생의 글은 읽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바로 입양한 범우 문고의 <메밀꽃 필 무렵>. 책 제목은 얼마나 익숙한가! 그 내용은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정도로만 외우고 있었던 내가 부끄러워진다.
<메밀꽃 필 무렵>(1933) 40분 정도 지하철을 타는 동안 그냥 눈으로 단번에 읽어내려갔다. 늙은 장돌이 허 생원이 젊은 시절 겪은 '단 한 번의 괴이한 인연'의 장소, 메밀꽃이 소금 뿌린 듯 가득했다던 봉평. 한 세월이 흐른 후 그곳에서 애숭이 장돌이 '동이'의 지극한 효심 이야기를 듣는 허 생원. 확실한 결론은 맺지 않지만 묘하게 꼬인 연이 곧 풀릴 것 같은 여운을 준다.
<들>(1936) '흙에서 초록으로... 땅은 어디서 어느 때 그렇게 많은 물감을 먹었기에 봄이 되면 한꺼번에 그것을 이렇게 지천으로 뱉아 놓을까.(p32-33)' - 와우! 이효석 선생의 상상력에 압도된다. 그 상상력을 이렇게 글로 묘사해 내는 그의 필력에 놀란다. 나는 요즘 '걸맹'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보고 듣고 생각한 것을 표현하려고 하면 도무지 글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기형도, 이효석 선생 같은 분들의 글을 읽으면 더더욱 그것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이런 깨우침이 좋다.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엉성할지라도 글로 표현해 보는 몸부림을 이렇게 치고 있으니.
<장미 병들다>(1939) '그만한 여유조차 없는 것은 다른 사람의 생각은커녕 자신의 생활이 눈앞에 가로막히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현대인으로서의 자기 개인에 대한 생각이 줄을 찾기 어렵게 갈피갈피로 찢어졌다 갈라졌다 하여 뒤섞이는 까닭이다.(p85)' - 일제강점기의 시대의 사람들도 그랬구나. 나도 직장 생활, 이어진 결혼생활로 내 앞가림조차 하지 못하다 보니 젊은 시절 우정을 같이 했던 친구들을 돌아보지 못하고 살아왔었다. 신앙생활을 같이 했던 몇몇 동기들을 거의 20년이 지난 후 만난 적이 있었는데 얼마나 반갑던지. 서로가 잘 챙겨주지 못했었는데도 그 우정은 여전해서 좋았던 기억이 난다. 퇴직 후 이제 내가 할 일은 주위를 챙겨보는 것이다.
- 헤리의 외면 일기
"양해하게. 집에는 아이들이 들끓구 아내는 만작이 되어서 배가 태산 같은데두 아직 산파도 못 됐네. 다달이 빛쟁이들은 한 두름씩 문간에 와서 왕머구리같이 와글와글 짖어대구...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이제는 벌써 자살의 길밖에는 눈앞에 보이는 것이 없네... 별수 있던가. 또 교장에게 구구히 사정을 하구 한 장을 간신히 돌려 왔네. 약소해서 미안하나 보태 쓰도록이나 하게."
봉투에 넣고 말고 풀없이 꾸겨진 지전 한 장을 불쑥 집어내어서 현보의 손에 쥐어주는 것이다. 현보는 불현듯 가슴이 찌르르하고 눈시울이 뜨거웠다. 손 안에 남은 부풀어진 지전과 땀 배인 동무의 손의 체온에 찐득한 우정이 친친 얽혀서 불시에 가슴을 조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