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 작가의 결 따라 책 읽기 3>(25-5)
작년 3월,
새로운 책 읽기 경험을 하기 시작했다.
그 처음을 박준 시인이 열어 주었다.
낯선 작가의 책에서 만난
또 다른 낯선 작가,
그 흐름을 따라 읽어 본 것이다.
박준이 허수경을, 그녀가 이문재를,
그가 강운구를, 그리고 그가 김훈을,
마치 바통을 이어 받듯이.
신선한 즐거움이었다.
그 후,
한 작가의 책 속에 소개된
낯선 작가들 중에 그 몇을 읽어 보는 것도
좋겠다, 싶어서
'ㅇㅇㅇ작가 결 따라 책 읽기'를 시작했다.
이정길, 신형철, 백가흠
그리고 새해 첫 출발은
김민정이었다.
김민정의 결 따라 읽는 그 세 번째,
또 허수경이다.
''2011년 1월 11일 화요일. 시집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출간으로 독일에서 귀국한 허수경 시인과 문학동네 시인선 론칭 기자간담회를 함께한 날'(p119)
- 허수경 작가! 작년 3월 시인 박준의 소개로 만나게 된 이! 이미 저세상으로 간 이후였다. 허수경은 임종이 다가올 때 그녀가 쓴 마지막 시들의 출간을 김민정에게 부탁했다. 그렇게 해서 유고집 <가기 전에 쓰는 글들>(2019) 이 세상에 나온 것이다. 깊게 애도하면서도 마음 붙잡고 이 책을 내기까지의 이야기가 진솔하게 담겨있다. '지금 여기 없는 사람의 여기 있는 책'(p123)을 봄이 오기 전에는 읽어야지. 허수경을 또다시 만날 생각에 내 마음에는 이미 봄이 찾아왔다. 최강의 한파가 찾아온 지금 이 순간에.'(내 블로그 25.1.9, 김민정 <읽을, 거리> 중에서)
이런 사유로 허수경 작가와
<가기 전에 쓰는 글들>로 재회했다.
시작 메모라는 말이 생소했다.
2011년부터 허수경이 생을 마감하기
몇 개월 전까지의 기록들.
탈고 없는
날 것 그대로의 글들을
읽을 수 있다니, 버겁도록 감사한 시간이었다.
읽는 내내,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최승자 시인이 어머니의 죽음을 보며 쓴 글이 떠올랐다.
'내 어머니는 영원한 마침표를 찍었으며, 조만간에 그녀가 살았던 한 문장 전체가 차례차례 지워져나갈 것이다. 그 길고 아, 그러나 너무도 너무도 짧고, 지루하고 지겹고 고달프고 안간힘 써야 했던 한 문장이, 쓰일 때보다 몇억 배 빠른 속도로 지워져 마침내 텅 빈 백지만 남으리라. 그뒤엔 이윽고 그 백지마저 없어져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그녀가 살았던 문장의 문장 없는 마침표 하나, 지구상의 외로운 표적 하나, 그녀의 무덤 하나만이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묘사하거나 설명하는 그 어떠한 동사도 이제는 모두 과거형을 취하리라.'(p50,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중에서)
◆ 책 읽다가 그 몇을 쓰다
미세먼지가 며칠 지독했었다. 오늘은 언제 그랬나 싶을 정도로 공기가 맑아져서, 다시 안산 자락길을 걸었다. 햇살에 맑은 공기가 스며든 주변의 나목들이 나를 반겨 주었다. 내려오는 길에 도서관에 들러 허수경의 유고집을 편다. '또 허수경! 다시 만난다는 설렘으로 도서관 한 모퉁이에서 단둘이 만나고 있다. '모두들 쉿! 쉿! 쉿! 허수경이 말하고 있잖아!'
2011년의 기록들이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 7년 중에 겨우 1년인데. 그만큼 그 해에 그녀는 이 시작 메모를 거의 일기 쓰듯 하고 있다. 순간에 지나가는 찰나를 글로 담는 그녀의 순발력에 놀라게 된다. 이런 축적의 기록들이 그녀의 시에 씨줄과 날줄이 되는구나, 싶었다. 얼마 전부터 나도 노트에 일상을 조금씩 적어 보고 있다. 아침, 저녁으로. 몇 줄에 불과하지만. 성찰의 시간이 된다. 고마운 일들은 감사로, 걱정되는 것들은 기도로.
<2011년 4월 26일, 봄 오후>(p10-13)
-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간대도 오후다. 봄 오후는 아니다. 아니다. 오늘이 입춘이니 봄 오후라고 해도 되나? 핵심은 이게 아니다. 오후라는 시간을 남다르게 보고 있는 시인의 남다름이다. 점심 먹고 커피 한 잔한 오후, 아파트 내 피트니스 룸에 가서 근육 운동한 오후, 산 중턱까지만 갔다 온 오후, 허수경의 책을 두 번째 읽으며 뭐 적을 게 없나 하고 고민하는 오후... 이 정도다. 이것도 억지로 쥐어짜서 내놓은 것일 뿐이다. 이 글을 보지 않았다면 이렇게 쓸 이유가 전혀 없다. 나에게는 '오후'가 그냥 오후일 뿐이기 때문이다. 허수경은 이것을 30개의 다른 오후로 풀어가고 있다. 이런 시선이 부럽다. 그렇게 해서 나온 그녀의 시들이 더욱 읽어 보고 싶어지는 순간이다.
'오늘은 내 문제가 아니라 민정 걱정하자. 얼마나 힘들까, 나의 민정은. 그 막막함, 어떤 치명적인 불행 앞에서 있는 것 같은. 그리고 불가항력인 거. 왜 다 태어나서는 이 고생이야?(p15, 2011.4.28) '한 시인의 탄생은 무릇 수학여행을 가지 못한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박준 시집. 꾀병. 인천 반달. 천마총 놀이터(놀이를 놀이이게 하고 겨울을 겨울이게 하는 놀이터에 봄이 와도 너는 돌아오지 않았으니......). 시인의 탄생.'(p86, 2011.10.27)
- 허수경이 내가 아는 작가들의 이름을 언급하는 부분이 나올 때마다 반갑고도 궁금해진다. 그들의 첫 만남, 그 관계의 깊이를 더해간 일화들이.
. 만일 죽는다면 아픈 것 말고 좋은 생각이 날까?(p22, 2011.5.12)
- 이 문장을 대하고는 바로 시작 메모의 뒤편으로 갔다. '2017년 6월 21일 - 이 병원으로 나는 응급차를 타고 왔다'로 시작되는 부분부터 다시 읽기 시작한다. 암이 재발하고 더 이상 수술조차 힘들다는 진단을 받고 돌아온 일주일이 지난 그날 '2018년 4월 15일'까지. 더 이상 음식을 먹지 못해 인공적인 영양 공급만을 받는 나날들이 이어지고 있다는 안타까운 지경까지 온 그녀를 지금 만나고 있다. 그녀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나를 보고는 그녀가 갑자기 베란다 창틀 위에 놓인 언 귤을 쪼갠다. 아직 향은 맡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는 듯이. '귤 향'을 맡으며 마지막까지 몇 개의 시라도 쓰겠다고 한다. 죽음 앞에서도 허수경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하나의 언 귤에서 이런 좋은 생각을 해 낸다.
'나는 귤을 쪼갰다.
귤 향!
세계의 모든 향기를 이 작은 몸안에 담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살아오면서 맡았던 모든 향기가 밀려왔다.
아름다운, 따뜻한, 비린, 차가운, 쓴, 찬, 그리고,
그리고, 그 모든 향기.
아,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가기 전에 나는
써야 하는 시들이 몇 편 있었던 것이다.
민정이 보내준 난다 노트 한 권을 꺼내들고
나는 쓰기 시작했다.
몇 편의 시가 나에게 남아 있는지 나는 아직 모르겠다.
가기 전에 쓸 시가 있다면 쓸 수 있을 것이다.
내일, 내일 가더라도.
그리고 가야겠다. 나에게 그 많은 것을 준 세계로.
그리고, 그리고, 당신들에게로.'(p307-8, 2018.4.15)
- 헤리의 반려책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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