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쓱 안긴 책 6>(25-6)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는 가능한 챙겨보려 한다.
공유와 서현진은 그들 중에도
최애에 속한다.
그들이 함께 한 넷플릭스 드라마 <트렁크>,
그 8부작을 거의 몰아서 보다시피 했다.
숨 쉴 틈이 없이 몰아치는 스릴과
박진감 넘치는 압도적 전개 속에
둘 사이에 피어나는 로맨스,
드라마 너머서도 둘은 오누이처럼
다정스러워 보였고,
둘의 사랑이 실제로도 이루어지길 바라는
팬심들도 엿볼 수 있었다.
소설이 원작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 몇 부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김려령이 그 작가라고.
김려령???
낯설지 않은 이름인데,
그 프로필을 보다가
세상에 <완득이>(2008)를 쓴
바로 그 작가였다.
그 이름을 까마득히 잊고 살아온 것이다.
그 책을 읽었다는 것,
영화로도 나왔다는 것 정도의
흐릿한 기억만 남아 있다.
드라마가 잊어버린 작가를 소환해 주었다.
이러한 연유로 김려령을 <트렁크>(2015)로
다시 만났다.
이 책을 읽는데
드라마 스토리와 자꾸 비교하려고 한다.
<트렁크>라는 집이 있다고 하자,
소설이 원래 가지고 있는 집을
이 드라마는 완전히 리모델링한 버전이다.
드라마를 먼저 본 나 같은 사람은
그 스토리를 잊으라.
새로운 버전이라 여기고
보면 그 흥미가 더할 것이다.
◆ 책 읽다가 그 몇을 쓰다
<완득이>를 서재에서 며칠째 찾고 있는데 아직 보이지 않는다. 이사하다가 잃어버린 듯하다. 이사할 때마다 많은 책들을 정리했지만 이 책은 그 대상에 들어갈 수 없는데 하면서 이제서야 챙기는 내가 약간 우습기도 하다. <우아한 거짓말>(2014)은 다행히 찾았다. 잊고 있었던 김려령이라는 작가, 그 만남의 흔적을 찾아보는데 기억이 희미하기만 하다. 가끔은 한 번 읽고 서재에 둔 책들을 다시 읽어 보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겠다 싶다.
책을 읽기 전에 작가의 말을 먼저 보는 습관이 있다. 여기에 반가운 이름이 나온다. 바로 박준 시인이다. '호탕하면서 예리한 편집자 박준 씨'(p214). 처음에는 동명이인으로 생각했다. 그가 맞았다. 시인이면서 창비의 편집자로서 오랫동안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편집이 이 책 속에 함께 했다고 생각하니 더욱 친밀하게 느껴진다.
'마지막 밤이다. 남편은 적당히 친절했고... 이 집에 온 첫날... 징계를 받더라도 중도파경을 각오했다.'(p7)
- 드라마를 보지 않고 이 첫 부분을 대했다면 '뭐지?' 했을 것이다. 결혼정보 회사 웨딩라이프의 VIP 전담 부서인 NM(new marrigge)는 미혼남녀 연결이 아니라 회원의 희망 배우자를 직접 보내는 계약 결혼 전문이다. 철저한 비밀 보장 속에. 주인공 스물아홉 노인지는 와이프 팀에 속하며 직급은 차장이다. 결혼반지가 4개나 있다. 5년 차.? 이곳은 그녀의 또 다른 세상이다. 현실과 이 세계를 오가며 엮인 여러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다양한 인간 본성을 경험한다. 날 것 그대로. 김려령이 구축한 이 상상의 공간으로 나는 다시 들어가고 있다. 그 끝을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두벌 책 읽기 시작!
'트렁크를 번쩍 들고 살며시 걸었다'(p12)
- 드라마에서는 아주 고급스러운 한정판 트렁크가 강한 인식을 준다. 소설 속에서는 그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이것은 주인공 노인지가 낯선 환경 속으로 들어가고 나올 때마다 늘 곁에 있는 반려와 같은 것이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그녀만이 겪은 희로애락이 그 속에 켜켜이 담겨 있을 것 같다. 읽다가 이 책의 마지막 문장으로 갔다. 거기에도 트렁크가 나오기 때문이다. '미친 새끼. 서둘러 문부터 걸어잠그었다... 허적허적 뒷걸음질 치다 발이 트렁크에 걸렸다. 본능처럼 트렁크 손잡이를 잡았다. 어떡하지.... 나는 왜 이렇게 무기력한가... 사위가 하얗게 뭉개지고 혼미한 고요가 찾아왔다. 내가 그토록 원했던 고요가...'(P211) 이 사이에 전개되는 이야기, 드라마와는 색다른 전개와 결말이기에 재방송 보는 듯한 지루한 느낌은 전혀 없다.
'꽉 막힌 병목구간을 어떻게든 꾸역꾸역 빠져나가는 자동차처럼, 언젠가는 나도 이 지난한 삶의 구간을 빠져나가겠지, 기대할 뿐이다.'(p36)
- 김려령의 심미안이 탁월하게 보이는 글이다. 인생 길이 속도감과 순탄함이 동시에 장착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다. 갑자기 안갯속에 갇혀 앞이 보이지 않는 답답함이 밀려오는 때가 있다. 인생의 병목구간이다. 나도 그런 시기가 있었고, 어쩌면 지금 그 구간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럴 때마다 나는 과거를 돌아본다. 나를 힘들게 했던 빨간색 문제들이 거의 대부분 녹색의 안전지대로 변해 있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나를 흔드는 현안의 문제들도 언젠가는 녹색으로 변할 것이라는 기대가 생겨난다. 나는 신앙인이기에 거기서 하나를 더 발견하게 된다. 그 문제 풀이 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이 함께해 주셨다는 것이다. 그 순간 감사가 넘쳐나고, 지금과 앞으로도 변치 않으시는 그분이 동행해 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그렇게 힘을 재충전하고 그 해결의 때를 알 수는 없지만 묵묵히 견디며 가는 것이다. 짓눌림이 수시로 오지만 다시 이것을 되새기며 또 일어서 가는 것이다. 그러면 어느새 그것은 풀려 있을 것이다. 파이팅 with JESUS!
'어머, X 새끼. 못 들은 척했다.(p36)'
- 노인지가 속으로 내뱉는 욕설이 낯설면서도 시원한 매력을 준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툭하고 튀어나온다. 소설 곳곳에 숨어 있다. 지뢰처럼. 독자들과 한층 더 솔직하고 친숙한 김려령식 필력이 돋보인다. 며칠 전 운전을 하는데 차가 한대씩 나가는 구간에서 양보해 주지 않는 택시 기사에게 나도 모르게 욕설이 나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얼마 가지 않아 그 차가 내 앞에 깜빡이를 넣고 들어 오려 했다. 너도 당해봐!, 끼어주지 않으려다가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 욕이 부메랑이 되어 나에게 몰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욕한 것 죄송하다고, 오늘도 영업 잘 하세요, 그렇게 응원의 마음을 보냈다. 운전하다 보면 가끔씩 나오는 욕설! 그럴 수도 있지, 상대가 잘못한 건데, 아무리 그래도 그것은 자기합리화일 뿐이다. 자중하자!
'내게는 세상 전체가 사막이었다. 살아남는 게 오히려 신기하고, 타인의 갈증에 무섭도록 냉담한 곳이었다. 서걱서걱. 나는 한 모금의 물이 간절했는데 내 입의 침마저 말렸다. 고개를 숙이면 그 참에 목뼈를 부러뜨리려 했고, 고개를 들면 날선 칼로 목을 치려 했다. 뭘 원하시는 겁니까. 복종. 골목대장만 됐다 싶어도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인간들이 많았다. 모래밭에 푹푹 빠지더라도 원하는 방향으로 걷고 싶은 만큼만 걸을 순 없는 걸까.'(p69)
- 조그마한 권력만 쥐어도 세상 다 가진 것처럼 우쭐대고, 아랫사람에게 복종만을 원하는 인간들의 군상들. 그런 리더들을 보면서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했었다. 하나 나도 자유롭지 못하다. 피해자로 시작해서 직위가 올라갈수록 점점 가해자가 되어 가는 나를 본 것이다. 시어머니를 욕하면서 똑같이 배운다는 며느리처럼. 알게 모르게 나에게 상처받은 친구들에게 사과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상처 준 것에 미안하다.'라고. 이제는 한 가정의 아버지로서 여전히 이 부분은 숙고해야 한다. 날마다 나를 돌아보지 않으면 이룰 수 없다. 오늘도 이를 위해 이 글 쓰고 있는 이유다.
현실의 위기를 피하기 위해 취업한 NM, 거기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 그 속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인간 본성의 악취들. 현실 세계는 두말할 것도 없다. 단란한 가정으로 포장된 노인지의 가족들, 이웃 할머니의 애잔한 가정사, 고등학교 때 삼총사 중 하나인 혜영의 갑작스러운 자살, 그 상처 속에 갇혀 살아가는 노인지와 시정 그리고 이 둘의 묘한 관계, 도처에 아픈 사연들로 가득하다. 엄태영은 두 세계에 다 나타나는 유일한 인물이다. 스토커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준다. 끝까지. 김려령은 고달픈 세상사의 짐을 이 트렁크에 다 담아서 버리고 싶었던 것일까? 이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 다들 외롭게 하루를 견디며 살아간다. 인간인(人)의 교훈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완전한 사람은 없다. 있다면 인간이 아니다. 상처가 다 있다. 혼자 제대로 설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것을 인정하고 人의 모양으로 함께 의지할 수 있어야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다. 은퇴하고 나니 낯선 시공간에 홀로 떨어진 듯한 기분이었다. 수시로 멀미 증상이 나타났다. 이 책 마지막에 나오는 노인지처럼 '나는 왜 이렇게 무기력한가. 구역질과 함께 현기증이 일었다.'(p211). 이 과도기에 가족, 지인 그리고 신앙은 변함없는 애정과 관심으로 내 곁이 되어 주었다. 고마운 존재다. 이제는 여생을 이들에게 빚을 갚으며 살아가는 일에 집중하고 싶다.
- 헤리의 반려책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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