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 작가의 결 따라 책 읽기 4>(25-8)
반려처럼 깊은 정을 준 한 권의 책을 보내고
또 다른 책을 만난다.
거의 일주일마다 일어나는 일이다.
가능한 그 만남에서 좋았던 순간을
글로 남겨보려고 애써 보지만
그러고 나면 늘 아쉬움이 남는다.
뭔가 놓친 것이 있는 것 같아서다.
이것은 욕심이다.
어떻게 한두 번 읽은 책에서 느낀 것을
다 담을 수 있겠는가?
그냥 감사한 마음만으로 떠나보내면 된다.
반려가 되는 순간 책은
더 이상 사물이 아니라 인격이 된다.
그 책을 쓴 작가와의 만남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작년 겨울 초엽에 그렇게 만났던 김민정 작가!
그때 출판계 인맥이 장난이 아닌 그녀의 결을
따라 읽을 다짐을 했었다.
새해부터 그 약속을 따라
그녀의 책 <읽을거리>(2024)를
시작으로 그 결을 따라가고 있다.
그녀 덕에 일생 평행선으로 이어졌을
그런 작가들을 지금 만나고 있는 중이다.
최승자 선생, 고 허수경 시인, 그리고
그 마지막으로 김화영 선생을
<여름의 묘약>(2013)으로 처음 만났다.
이 만남의 사유를 그 당시 내 블로그에
담았던 기록으로 대신한다.
'<1월 4일 - 인터뷰 - 김화영>(<문학동네> 2013년 겨울호)
김화영 선생. 나에게는 낯선 이름이다. 100권 이상의 책을 번역한 분이라니. 문학평론가이시기도 하고. 김민정과 선생의 티키타카가 정겹고 살갑다. 프로방스 대학교 대학원 문학박사이신 선생은 그 당시 한국에는 생소한 작가들의 책을 번역했다고 한다. 출판사들에게는 리스크일 수밖에 없다. 선생의 고집스러운 추진력으로 우여곡절 끝에 낸 책들이 독자의 반응을 받으면서 쭉쭉 그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스스로 먼저 감동받은 책을 번역한다는 소신이 이루어 낸 쾌거로 보인다. 나도 그의 덕을 본 사람이라는 것을 여기서 알게 되었다. 나는 3년 반전에 미셀 투르니에의 책 <외면 일기>를 읽고 오랫동안 멈추었던 글쓰기를 다시 시작했다. '글쓰기 나중에, 또 나중에. 그렇게 매번 미루며 왔던 것. 오늘 미셀 투르니에가... 매일 몇 줄이라도 써보라고 한다.'(나의 인스타, 2021.9.17 중에서) 그를 한국에 처음 소개한 분이 바로 김화영 선생이는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가? 마치 비밀스러운 사실을 알게 된 듯 기뻤다. 따라서 선생은 나의 은인이다. 앞으로 더욱 그의 번역서와 산문집에 관심이 갈 것 같다. 이렇게 또 한 분의 스승과 그의 책들을 소개받는다. 김민정 작가의 덕으로. 감사하다. '나는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하는 문제보다 내가 무엇을 번역할 것인가, 하는 문제 쪽에 더 관심이 갔던 것 같아. 원작 자체가 내 맘에 들어야 번역을 하고 싶은 열정이 생기니까.'(p61)'(내 블로그 <헤리의 반려책 이야기, #김민정 작가 2> 중에서
◆ 책 읽다가 그 몇을 쓰다
안산 자락길 산책 예배를 드린 후에 도서관으로 향했다. 선생의 책 4권을 책상에 올려놓고 어떤 책을 읽을까, 고민했다. 김민정 작가의 결을 따르자면 <행복의 충격>(1975, 2112개정판)을 읽는 것이 맞지만, 70대가 된 시점에서 쓴 산문이 나에게는 더 좋을 것 같아서 <여름의 묘약>(2013)으로 선택했다. 김화영 선생은 1969년에 유학을, 1977년에는 신혼 생활을 보낸 엑상프로방스를 30년이 지난 2011년 여름에 그의 가족들과 방문을 한다. 그때의 아쉬움을 다시 채우기 위해 그다음 해 여름, 또 오트프로방스를 방문한다. 이번에는 본격적인 문학기행이다. 십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나는 그 당시 선생의 프로방스 여정에서 나온 그의 삶과 문학에 대한 통찰을 귀 기울여 듣고 있다.
프로방스? 사실 이 지역을 깊이 있게 알아본 적이 없다. 그 이름도 낯선데 그 지방에 있는 지명들은 더욱더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여기가 거기 같고 거기가 여기 같다. 그럼에도 선생의 섬세한 필력이 그것들을 전혀 불편하지 않게 한다. 기행문을 어쩌면 이렇게 놓치는 것이 거의 없이 섬세하게도 써 내려가시는지, 나에게는 완전 이방의 땅인데 읽으면 읽을수록 그곳에 가보고 싶어진다.
'나는 내 청춘의 요람이었던 이 도시가 돌연 나를 '이방인'인 양 밀어내는 느낌 때문에 잠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아마도 나를 진정한 이방인으로 만들어버린 것은 흘러가 버린 세월, 내 얼굴에서 젊음을 지워버린 시간, 그리고 지금 한창 신명이 나서 저희들끼리 저만큼 가고 있는 우리 집 아이들의 빛나는 웃음으로부터 밀려난 이 거리감일 터이다.'(p54)
- 김화영 선생이 유학과 신혼 시절을 보낸 엑상프로방스를 30여 년이 지난 후에 다시 방문한다. 선생에게는 청춘의 고향과 같은 곳이리라. 100여권의 번역서를 세상에 내는 동안 세월은 무심히 흘러 어느덧 70의 문턱에 선생을 서게 했다. 지금 거기에 두 딸, 사위, 어린 손자, 그리고 사돈 내외와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행복한 순간인가? 그런 중에 잠시 자신을 돌아보는 깊은 성찰이 엿보이는 이 문장에서 나는 잠시 멈추었다. 어느덧 나도 이제 60문턱을 앞두고 있다. 가끔씩 아웃사이더가 되어가는 왠지 모를 거리감에 흔들릴 때가 있다. 추운 겨울에 잎이 다 떨어진 채 서 있는 나목이 추해 보이지 않는 것은 봄의 소망을 가지고 묵묵히 견뎌내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의 순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훈련이 지금 나에게 필요하다. 그것은 오늘이 내 생애 가장 젊은 날이요,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이 여정이 결코 허투루가 아니라는 것을 마음 깊이 담는 데서 시작되리라. 이렇게 인생 선배들을 만날 때마다 한 수를 배우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지자. 그 순간을 이렇게 글을 쓰며 나를 성찰하는 것, 내 인생의 디딤돌이 될 것이다.
<목신을 찾아서> 2012년 여름, 오트프로방스를 1년 만에 다시 방문한 김화영 선생은 본격적으로 문학기행을 한다. 선생이 40십 년 이상을 켜켜이 알아 온 작가들, 그들이 집필한 장소들을 쉼 없이 열정적으로 방문하고 있다. 네비게이터도 헷갈려 하는 깊숙한 곳까지. 지명뿐만이 아니라 작가, 책들까지 낯선 가운데. 얼마 전에 읽은 함정임 작가의 책이 묘하게 겹쳐지며 떠오른다. 작가들의 묘를 따라 몇십 년의 기행을 집대성한 그 책처럼 이 책도 한 번에 다 담을 수 없다. 욕심을 내려놓으니 한결 마음이 편하다. 그렇다고 다 내려놓는 것은 아니다. 선생이 소개해 주는 작가와 책의 기록은 가능한 한 담아 두려 한다. 그의 결을 따라 책을 읽는 기회를 가지고 싶기 때문이다. <이방인> <페스트> 두 권 정도로 잠시 만난 알베르 카뮈를 그의 산문이나 서간집으로 다시 만나고 싶다. 김화영 선생이 최애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 책에 카뮈와 더불어 많이 언급된 이가 있다. 장 지오노, 나는 처음 들어 보는 작가다. 선생은 나에게 낯설기만 한 작가들의 책을 한가득 담은 바구니를 선물로 주셨다. 감사하다. 갑자기 이 책들을 미치도록 빠르게 읽고 싶다. 이것은 욕심이다. 은퇴 후부터 책을 천천히 읽고 소화해 오고 있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다시 지금의 스텝을 따르기로 한다. 자중해!
거의 마지막 부분이다. 나에게는 낯선 프로방스의 여름을 김화영 선생과 두 번의 여름을 그곳에서 보냈다. 나의 작은 그릇에 이 방대한 기록을 담기에는 너무 벅찼다. 몇이라도 건지겠자는 마음으로 마무리를 하고 있다. 끝나가는 무렵에 나에게 꽂힌 문장이 있는데 기록을 하지 않아서 지금 몇 번을 뒤져보는데 아무리 해도 나오지를 않고 있다. 기록이나 색인의 중요성을 다시금 새긴다. 나의 흐린 기억을 믿다니 바보같이. 다시 끝에서부터 역순으로 차분히 읽어 가고 있다. 그것을 담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와우! 드디어 찾았다.
'이 공원(프레 카틀랑)을 찾은 것이 벌써 몇 번째인가? 1977년 여름, 첫아이를 가진 만삭의 아내와 함께 처음 찾아왔던 이 공원, 초록빛 임부 차림으로 언덕길을 힘겹게 올라가던 앳된 아내의 뒷모습이 어제인 듯 눈에 선하다. 그리고 35년의 세월이 흘러 그때 뱃속에 있던 아이가 어머니가 된 지금, 머리가 희끗해지려는 초로의 아내와 다시 인적 없는 공원을 호젓이 걷는다.'(p359-360)
- 거실에 오래된 피아노가 있다. 버리기는 아깝고 앤티크 한 느낌이 좋아서 이사 때마다 버리지 못하고 함께 온 친구다. 지금은 선반처럼 쓰고 있는데 그 위에 가족사진 여러 개가 세워져 있다. 때마다 성장해 가는 아이들의 모습과 나이 들어가는 우리 부부가 담겨 있다. 아이들은 이제 30대 전후의 성인들로, 우리 부부는 흰머리가 희끗해져 있다. 살다 보니 어느덧 여기까지 와 있구나, 하며 파노라마같이 지금까지의 여정이 떠오른다. 이런저런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럼에도 건강하게 다들 여기까지 온 것에 감사한 마음뿐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을 이 마음으로 끝까지 파이팅 하자!
- 헤리의 반려책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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