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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승협 Aug 23. 2023

#아니 에르노 작가

집착

30년 가까이 한 직장에서
직장 동료로 친분을 이어 왔던 CH.

나보다 9개월 앞서 퇴사한 그는
내가 퇴직할 즈음에 대구에 있는
매출 1000억이 넘는 회사의
전무 자리로 가게 되었다.

아침마다 형수가 차려주는 따뜻한 밥을
먹고 온다며 자랑하던 그가
혼자 사는 것을 감내하며 내려간지
벌써 2년 가까이 되고 있다.

지금은 그곳에서 멋지게 일을 감당해 내고 있다.

거의 일주일에 한번은  
그가 먼저 전화를 걸어온다.  

서로의 안부를 물으면서
각자의 새로운 환경 적응기를 나누곤 했었다.

통화 마지막에는 꼭
'대구에 나 있을 때 내려와서
맛있는 것 먹고 좋은 곳 함께 가보자'라고 했다.

금, 토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가기가 여의치 않다고 계속 미루고 있던 것을
같은 직장동료이자 내 친구인 P와 함께
지난 주 마침내 1박 2일로 다녀왔다.

지천명의 나이인 세 사람이 폭염 속에서도
마치 어린아이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으로
더운 줄도 모르고 천진난만하게 뛰어놀았다.

1박 2일 동안 아낌없이 물질과 마음을
나누어 준 두 사람, 고맙고 고맙소.

가고 오는 열차에서 읽은 책,
김상용 시인의 수필집 <무하선생 방랑기>에
''시는 나다'할 수 있는 시인이 '피로 썼다'할 수도 있다',라는
문장에 꽂혀 한참을 사색했던 기억이 난다.

여기에 빗대어 '이 소설은 나다'라는 작가가 있다.
바로 2022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아니 에르노'이다.

두 번째로 읽은 그녀의 소설 <집착>에서도 이 말은 그대로 통한다. 소설 속 주인공이 바로 작가 자신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에 늘 마음이 쏠려 잊지 못하고 매달림'이라는 사전적 의미의 '집착 (執着)'을 '아니 에르노'는 그녀의 실제 체험을 소재로  가공 없이 날 것 그대로 이 책으로 고백하고 있는 듯하다.

읽는 동안 이 책에 집착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 책 읽다가 날것 그대로 쓰다.

지난 22년 7월 생면부지인 아니 에르노의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를 읽고 그 소감을 인스타에 올린 적이 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노벨 문학상 작가의 책은 항상 발표 후에 찾아보았기 때문에 사전에 읽어 본 작가는 그녀가 유일하기에 나에게는 더욱 인상 깊은 작가다.

 '강의 가방을 들고 있는 전철 안의 사십 대 여성은 누구든지 '그 여자'여서, 바라보는 것조차 고통이었다.(p15)... ' -  자기가 먼저 헤어지자고 했던 남자가 다른 여자와 동거한다는 소식 이후에 급격히 집착 증상에 빠지고 있다. '그 여자'에서 '그 여자 군'으로 확장되면서.

그 여자에 대한 몇 가지 정보가 확장되어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이 그녀를 적대시하는 사람과 공간으로 여겨진다. 질투의 마음을 이렇게 깊고도 세밀하게 표현하다니. 강박증이 점점 심해져 가고 있어서 책 읽기를 잠시 멈추었다. 그 여자가 살고 있다는 건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전화번호까지 일일이 조사해서 걸고 있는 그녀를 보고.

옮긴이가 '질투의 심연을 만남 치열한 글쓰기'라 콕 집어 말한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짧은 글이지만 결코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여운이 긴 소설 <집착>.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깨닫게 한다. 남녀관계에서만 이 '집착'을 이해하는 데서 거치지 말고 삶을 살아가는 모든 관계로 확장해서 볼 일이다. 지금 내가 빠진 집착은 없나? 헤어져야 할. 그걸 물어보는 시간이었다.


- 헤리의 외면 일기


그는 때때로 아무 생각 없이 "내가 당신한테 말 안 했던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이 질문 아닌 질문에 내 표정은 곧 어두워졌다. 그가 그 여자에게는 이미 이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 곁에 있기 때문에, 평범한 것에서부터 중요한 일에 이르기까지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는 것은 그 여자였다. 나는 늘 두 번째로- 그것도 잘해야- 알게 되었다...나를 가끔씩 만나는 친구나 친지 그룹으로 분류해 넣었다...  "당신에게 말 안 했던가?"는 곧 당신에게 그걸
말할 필요가 없었지라는 소리였다.


- 아니 에르노의 <집착>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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